"국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6번째 줄: 16번째 줄:
 
국사(國師)는 국가와 백성, 제왕의 스승이 될 만한 고승에게 내려 준 봉호(封號)이다. 고승을 국사로 봉하는 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으로 국사에 책봉된 승려는 북제(北齊)의 [[법상|법상(法常)]]이라고 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국사를 임명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새로 왕이 즉위하면 국사와 [[왕사|왕사(王師)]]를 책봉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는데, 이러한 제도는 조선 태조대까지 유지되었다. 국사는 시기에 따라 국존(國尊), 국통(國統), 국로(國老)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ref>강호선,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019 국사(國師)]"<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국사(國師)는 국가와 백성, 제왕의 스승이 될 만한 고승에게 내려 준 봉호(封號)이다. 고승을 국사로 봉하는 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으로 국사에 책봉된 승려는 북제(北齊)의 [[법상|법상(法常)]]이라고 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국사를 임명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새로 왕이 즉위하면 국사와 [[왕사|왕사(王師)]]를 책봉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는데, 이러한 제도는 조선 태조대까지 유지되었다. 국사는 시기에 따라 국존(國尊), 국통(國統), 국로(國老)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ref>강호선,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019 국사(國師)]"<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국사의 변천과정===
 +
신라 [[신라 신문왕|신문왕(神文王)]] 때 [[경흥|경흥(憬興)]]을 국로(國老)에 임명한 것을 최초의 국사 책봉 사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신라 효소왕|효소왕(孝昭王)]] 때에는 [[혜통|혜통(惠通)]]을 국사로 임명하는 등 국사를 책봉한 사례는 계속해서 발견되는데, 특히 신라하대에 [[선종|선종(禪宗)]]이 유행한 뒤에는 고승이 입적한 뒤 왕명으로 시호를 내리고 국사로 추증하는 경우가 많았다.<ref>강호선,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019 국사(國師)]"<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고려 [[고려 태조|태조]] 때에는 국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국가와 왕실의 스승으로 존숭을 받던 승려들을 [[왕사]] 또는 [[대사|대사(大師)]]라 부르며 국가적으로 예우하였다. 왕에 의한 국사 책봉이 제도화된 것은 광종대로, 이때 이루어진 일련의 승정 제도 정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종대에는 [[찬유|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瓚幽, 869-958년)]]를 국사로 책봉하였다.<ref>강호선,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019 국사(國師)]"<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고려시대에는 왕이 즉위하면 국사와 [[왕사|왕사(王師)]]를 책봉하였는데, 전왕(前王)대의 인물을 그대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입적하면 다시 새로운 승려를 임명하였다. 국사 선정 기준은 분명치 않으나, 대개 당대의 유력한 종단에서 고승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즉 국사의 배출은 교단의 성쇠를 보여 주는 기준이 될 수 있었다. 국사와 [[왕사]]는 서로 다른 종단의 승려를 임명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공민왕대부터 공양왕대까지는 [[선종]]인 [[가지산문|가지산문(迦智山門)]]과 [[사굴산문|사굴산문(闍崛山門)]]에서 선정하였다. 국사는 당대 최고의 승직이자 명예직이었으므로, [[교종|교종(敎宗)]]에서는 [[승통|승통(僧統)]], [[선종]]에서는 [[대선사|대선사(大禪師)]] 같은 최고의 승계를 가진 승려가 임명되었다. 또 [[법경|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의 경우처럼 [[왕사]]를 거쳐 국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후기에는 무외(無畏) 국통(國統) [[정오|정오(丁午)]]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국사를 국통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국사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존(國尊)으로 호칭을 변경하기도 하였다.<ref>강호선,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019 국사(國師)]"<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대까지는 왕이 국사와 [[왕사]]를 임명하는 제도가 계승되었다. 고려시대의 마지막 국사와 [[왕사]]는 공양왕대에 임명된 승려 [[혼수|혼수(混修)]]와 [[찬영|찬영(粲英)]]이었는데, 태조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이들의 직위를 유지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말기에 선왕이 임명한 국사와 왕사가 입적하고 나서야 새로운 인물을 임명하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392년([[조선 태조|태조]] 1) 7월에 [[혼수|혼수]]가 입적하자, 1394년에 [[천태종|천태종(天台宗)]] 승려 [[조구|조구(祖丘)]]를 새로이 국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1395년([[조선 태조|태조]] 4) 11월에 [[조구]]가 병으로 입적한 뒤에는 다시 국사를 임명하지 않았다. [[조선 태종|태종]] 연간에 불교 교단을 통폐합할 때 비로소 국사·왕사를 봉하는 칭호를 없앴다는 [[사헌부|사헌부(司憲府)]]의 상소 내용으로 미루어, 국사·[[왕사]] 제도는 태종대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ref>강호선,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019 국사(國師)]"<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7월 22일 (토) 17:22 판

국사
(國師)
대표명칭 국사
한자표기 國師



정의

신라·고려·조선 때, 백성의 정신적 지도자로 임명된 승려의 가장 높은 지위.[1]

내용

국사(國師)는 국가와 백성, 제왕의 스승이 될 만한 고승에게 내려 준 봉호(封號)이다. 고승을 국사로 봉하는 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으로 국사에 책봉된 승려는 북제(北齊)의 법상(法常)이라고 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국사를 임명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새로 왕이 즉위하면 국사와 왕사(王師)를 책봉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는데, 이러한 제도는 조선 태조대까지 유지되었다. 국사는 시기에 따라 국존(國尊), 국통(國統), 국로(國老)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2]

국사의 변천과정

신라 신문왕(神文王)경흥(憬興)을 국로(國老)에 임명한 것을 최초의 국사 책봉 사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효소왕(孝昭王) 때에는 혜통(惠通)을 국사로 임명하는 등 국사를 책봉한 사례는 계속해서 발견되는데, 특히 신라하대에 선종(禪宗)이 유행한 뒤에는 고승이 입적한 뒤 왕명으로 시호를 내리고 국사로 추증하는 경우가 많았다.[3]

고려 태조 때에는 국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국가와 왕실의 스승으로 존숭을 받던 승려들을 왕사 또는 대사(大師)라 부르며 국가적으로 예우하였다. 왕에 의한 국사 책봉이 제도화된 것은 광종대로, 이때 이루어진 일련의 승정 제도 정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종대에는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瓚幽, 869-958년)를 국사로 책봉하였다.[4]

고려시대에는 왕이 즉위하면 국사와 왕사(王師)를 책봉하였는데, 전왕(前王)대의 인물을 그대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입적하면 다시 새로운 승려를 임명하였다. 국사 선정 기준은 분명치 않으나, 대개 당대의 유력한 종단에서 고승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즉 국사의 배출은 교단의 성쇠를 보여 주는 기준이 될 수 있었다. 국사와 왕사는 서로 다른 종단의 승려를 임명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공민왕대부터 공양왕대까지는 선종가지산문(迦智山門)사굴산문(闍崛山門)에서 선정하였다. 국사는 당대 최고의 승직이자 명예직이었으므로, 교종(敎宗)에서는 승통(僧統), 선종에서는 대선사(大禪師) 같은 최고의 승계를 가진 승려가 임명되었다. 또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의 경우처럼 왕사를 거쳐 국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후기에는 무외(無畏) 국통(國統) 정오(丁午)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국사를 국통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국사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존(國尊)으로 호칭을 변경하기도 하였다.[5]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대까지는 왕이 국사와 왕사를 임명하는 제도가 계승되었다. 고려시대의 마지막 국사와 왕사는 공양왕대에 임명된 승려 혼수(混修)찬영(粲英)이었는데, 태조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이들의 직위를 유지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말기에 선왕이 임명한 국사와 왕사가 입적하고 나서야 새로운 인물을 임명하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392년(태조 1) 7월에 혼수가 입적하자, 1394년에 천태종(天台宗) 승려 조구(祖丘)를 새로이 국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1395년(태조 4) 11월에 조구가 병으로 입적한 뒤에는 다시 국사를 임명하지 않았다. 태종 연간에 불교 교단을 통폐합할 때 비로소 국사·왕사를 봉하는 칭호를 없앴다는 사헌부(司憲府)의 상소 내용으로 미루어, 국사·왕사 제도는 태종대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6]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주석

  1.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국사",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강호선, "국사(國師)"『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강호선, "국사(國師)"『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강호선, "국사(國師)"『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강호선, "국사(國師)"『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강호선, "국사(國師)"『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