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구례 연곡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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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지리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683 연곡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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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지리산에 있는 .
 
 
  
 
=='''내용'''==
 
=='''내용'''==
 
 
===역사===
 
===역사===
연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연기(緣起)]]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남아있는 역사적 자료는 전해지지 않으며 일제시대 만우 정병헌 스님이 기록한 『지리산화엄사』말미에 '연곡사 사적'을 기술하고 있어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연곡사는 현재 남아있는 유적의 모양새나 명문 등을 살펴볼 때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f>이태호, 황호균, 『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 참조: [http://haeinji.danah.kr/contents/default_print.html?ct_no=2942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 해인』<sup>online</sup></online></html>.</ref>그 뒤 연곡사는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뒤 [[태능|태능(太能)]]이 중창하였다. 1907년에는 의병장 [[고광순|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버렸다. 그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1981년 새 대웅전을 짓는 공사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683 연곡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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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鷰谷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연기(緣起)]]가 창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는 전하지 않으며 일제시대 만우 정병헌 스님이 기록한 『지리산화엄사』말미에 '연곡사 사적'을 기술하고 있어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연곡사는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의 모양새나 명문 등을 살펴볼 때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던 듯하다.<ref>이태호, 황호균, 『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 참조: [http://haeinji.danah.kr/contents/default_print.html?ct_no=2942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 해인』<sup>online</sup></online></html>.</ref> 그 뒤 연곡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태능|태능(太能)]]이 중창했다. 1907년에는 의병장 [[고광순|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버렸다. 그 1942년에 중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 되었다. 하지만 이후 1981년 새 대웅전을 짓는 공사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683 연곡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사찰이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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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름의 유래===
연기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tour.jsp?cid=126363 연곡사]", 관광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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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가 이곳에 처음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였다.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 마리가 솟아 날아간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tour.jsp?cid=126363 연곡사]", 관광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ref>
  
 
===지리===
 
===지리===
연곡사는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직전리 조금 못미처 자리잡고있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붙여진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하였다가 바뀐 이름이라고 한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게,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763&cid=42840&categoryId=42851 연곡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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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는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직전리에 조금 못 미처 자리잡고 있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붙은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이것에서 옛날에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했다가 바뀐 이름이라고 한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763&cid=42840&categoryId=42851 연곡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특징===
 
===특징===
연곡사는 1745년(영조 21)에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어 비로소 지방관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ref>이태호, 황호균, 『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 참조: [http://haeinji.danah.kr/contents/default_print.html?ct_no=2942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 해인』<sup>online</sup></online></html>.</ref> 1895년쯤에도 여전히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절이 폐쇄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683 연곡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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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는 1745년([[조선 영조|영조]] 21)에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어 비로소 지방관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ref>이태호, 황호균, 『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 참조: [http://haeinji.danah.kr/contents/default_print.html?ct_no=2942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 해인』<sup>online</sup></online></html>.</ref> 1895년까지도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했는데, 밤나무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 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폐사되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683 연곡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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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iljumun-1.jpg|구례 연곡사 일주문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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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beomjonggak.jpg|구례 연곡사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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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1.jpg|구례 연곡사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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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daejeokgwangjeon.jpg|구례 연곡사 대적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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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2.jpg|구례 연곡사 대적광전과 관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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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Myeongbujeon.jpg|구례 연곡사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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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east_stele.jpg|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
 +
파일:BHST_Yeongoksa_east-stupa.jpg|구례 연곡사 동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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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Go-Gwangsun_sunjeolbi.jpg|구례 연곡사 고광순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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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Hyeongak_stele.jpg|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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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north-stupa.jpg|구례 연곡사 북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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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pagoda.jpg|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
파일:BHST_Yeongoksa_Soyo_stupa.jpg|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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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Yeongoksa_stupa-1.jpg|구례 연곡사 부도전의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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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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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호, 황호균, 『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 참조: [http://haeinji.danah.kr/contents/default_print.html?ct_no=2942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 해인』<sup>online</sup></online></html>.
 
* 이태호, 황호균, 『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 참조: [http://haeinji.danah.kr/contents/default_print.html?ct_no=2942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 해인』<sup>online</sup></online></html>.
 
*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tour.jsp?cid=126363 연곡사]", 관광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tour.jsp?cid=126363 연곡사]", 관광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게,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763&cid=42840&categoryId=42851 연곡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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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763&cid=42840&categoryId=42851 연곡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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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분류:사찰]]

2024년 4월 12일 (금) 00:26 기준 최신판

구례 연곡사
(求禮 鷰谷寺)
구례 연곡사 경내
대표명칭 구례 연곡사
한자 求禮 鷰谷寺
주소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543년
창건자 연기(緣起)
경내문화재 구례 연곡사 동 승탑, 구례 연곡사 북 승탑,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지리산에 있는 절.

내용

역사

연곡사(鷰谷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연기(緣起)가 창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는 전하지 않으며 일제시대 만우 정병헌 스님이 기록한 『지리산화엄사』말미에 '연곡사 사적'을 기술하고 있어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연곡사는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의 모양새나 명문 등을 살펴볼 때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던 듯하다.[1] 그 뒤 연곡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태능(太能)이 중창했다. 1907년에는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버렸다. 그 후 1942년에 중건했으나, 한국전쟁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 되었다. 하지만 이후 1981년 새 대웅전을 짓는 공사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2]

사찰 이름의 유래

연기가 이곳에 처음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였다.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 마리가 솟아 날아간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3]

지리

연곡사는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직전리에 조금 못 미처 자리잡고 있다. 피아골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붙은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이것에서 옛날에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했다가 바뀐 이름이라고 한다.[4]

특징

연곡사는 1745년(영조 21)에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어 비로소 지방관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5] 1895년까지도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했는데, 밤나무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 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폐사되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6]

지식 관계망

  • 구례 연곡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구례 연곡사 동 승탑 구례 연곡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구례 연곡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구례 연곡사 북 승탑 구례 연곡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구례 연곡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 구례 연곡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구례 연곡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현각 구례 연곡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현각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태능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구례 연곡사 태능 A는 B가 중건하였다 A ekc:renovator B
구례 연곡사 고광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543년 연기가 구례 연곡사를 창건했다.
1745년 구례 연곡사가 왕실의 신주목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1907년 구례 연곡사가 의병장 고광순이 일본과 싸우는 과정에서 불타버렸다.
1950년 구례 연곡사한국전쟁피아골 전투로 폐사되었다.
1981년 구례 연곡사의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주석

  1. 이태호, 황호균, 『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 참조: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월간 해인』online.
  2. 김위석, "연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연곡사", 관광지정보,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베개, 2009. 온라인 참조: "연곡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이태호, 황호균, 『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 참조: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월간 해인』online.
  6. 김위석, "연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