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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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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샘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25일 (화) 19:21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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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제 31대 왕.

내용

개요

공민왕은 고려 제 31대 왕(1330-1374, 재위 1351-1374)으로,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며, 이름은 전(顓)이고,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다.[1]

아버지인 충숙왕과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비(妃)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 밖에 혜비 이씨(惠妃 李氏)·익비 한씨(益妃 韓氏)·정비 안씨(定妃 安氏)·신비 염씨(愼妃 廉氏)가 있다.[3]

업적

공민왕은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으며, 왕권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몽골풍을 금지하고 친원파 일당을 숙청하다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을 실시했다. 또 국내에 쌓여 있는 모순을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공민왕의 개혁은 이렇게 반원자주정책으로 몽골의 흔적을 지운 후 왕권을 강화하는 단계로 진행된다.[4]

공민왕은 전국에 왕명을 내려서 몽골풍을 금지하였다. 공민왕도 즉위 전에야 변발을 했지만, 즉위하자마자 변발을 풀고 몽골옷도 벗어던졌거든요. 또 원나라가 한 단계 떨어뜨려 놓은 관제를 복구한다. 그리고 친원파 중 당시 가장 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 바로 기철(奇轍)이다. 공민왕은 이 기철 일당을 숙청한다.[5]

변발과 호복 등 몽골식 생활 풍습을 금지하고, 정동행성을 없앴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99년 만에 되찾았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각종 시호와 제도들을 다시 고쳤다. 즉 ‘충’자가 들어가는 왕의 시호를 바꾸었다.[6]


왕권을 강화하다

고려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한 왕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어. 그리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권문세족들을 제거해야 하는 큰 숙제를 풀어야 했지. 공민왕은 이런 개혁을 함께해 줄 사람으로 신돈을 찾아냈어.

신돈은 권문세족과 거리가 먼 스님이었기 때문에 개혁에 적합한 인물이었지. 신돈의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였다고 하는데, 노비 출신은 당시 스님이 될 수 없었던 풍습을 생각할 때, 이 이야기는 아마 사실이 아닐 거야.

공민왕과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관청을 만들고 스스로 판사가 되었어. 그럼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었을까? 한자만 잘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밭 전(田), 백성 민(民), 변할 변(變), 바를 정(正), 그리고 도감은 관청이라는 뜻이야.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거나 노비가 된 백성을 바르게 판단하여 토지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농장의 노비는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는 관청이라는 뜻이야.

노비 신분에서 양인으로 해방된 사람들은 땅을 얻어 열심히 농사를 짓고, 그 수확을 왕에게 세금으로 바쳤어. 뿐만 아니라 군대에도 가기 때문에 왕권이 강해지게 되지. 반대로 권문세족들은 경제적인 기반을 잃어버리게 됐어. 백성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공민왕의 개혁 조치를 몹시 좋아했어. 신돈을 성인5)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恭愍王] -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파! (한국사 개념사전, 2010. 6. 4., (주)북이십일 아울북)

노국대장공주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왕릉이라는 공민왕릉.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와의 사랑은 700년을 건너뛰어 오늘날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개성 근교에 자리 잡은 공민왕릉은 고려왕릉 가운데 유일한 부부 쌍릉이다. 죽어서도 함께 한 이들의 사랑이었지만, 출발은 정략결혼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의 정치 경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생모가 고려인인 관계로 왕위 계승에서 번번이 낙마한 공민왕은 1349년(충정왕 1년)에 정략적으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고 2년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365년(공민왕 14년)에 노국대장공주가 난산(難産)으로 죽자, 그녀를 잊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의 초상화를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울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본래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살아 있을 때에도 왕비의 침소에 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노국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가 죽은 뒤로 계비를 들이기도 하고, 혹은 신돈과 함께 불공을 드리며 축원하기도 했으나 후사를 얻지 못했다. 그 사이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다 신돈의 비첩인 반야라는 미인을 보고 총애하였다. 공민왕의 사랑을 받은 반야는 1365년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공민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이다. 우왕의 어릴 적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였는데 그를 몹시 사랑했던 공민왕은 자주 장난감을 갖다 주며 부정을 나타냈다.

공민왕은 태후의 반대에 부딪혀 모니노를 세자로 삼지 못했으나, 여전히 태후 궁에 두고 우(禑)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강녕부원대군에 봉하였다. 이듬해에는 우가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고 발표하게 했다. 당시 궁인 한씨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는데 우왕의 친모를 궁인 한씨라고 한 것은 생모인 반야가 신돈의 비첩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우왕은 당시에 공민왕의 아들로 공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우왕은 반야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른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우왕신씨설’을 내세운 이성계 일파에 폐위되고 죽임을 당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恭愍王] -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다 (인물한국사)


공민왕의 죽음

믿고 따랐던 신돈마저 잃자 공민왕은 오래전 죽은 노국대장공주를 더욱더 그리워하며 술독에 빠져 지냈어요. 원래 공민왕은 여색을 밝히지 않았는데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 후궁들이 총애를 받으려 덤벼들자 오히려 여자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대신 귀족의 자제 중 젊고 인물이 출중한 남자들을 뽑아 자제위를 만들었어요. 자제위는 왕의 침전에 기거하면서 시중을 들고 동성애의 상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공민왕은 준수한 외모의 홍륜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 언제까지고 남색만 밝힐 수는 없었죠.

당시 공민왕에게 아들이 한 명 있기는 했습니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 후궁에게서 얻은 아들 ‘우’였어요. 하지만 공민왕은 ‘우’가 신돈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거든요. 왜냐 우를 낳은 여자가 바로 신돈의 여종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결국 공민왕은 새로운 아들을 얻고자 해괴망측한 짓을 꾸밉니다. 자제위 중에서 홍륜, 한안 등에게 후궁과 동침하라고 시킨거예요. 그렇게 해서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아들로 위장해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한 거죠.

마침내 후궁이 홍륜의 아이를 잉태하자 공민왕은 홍륜 일파를 제거하도록 시킵니다. 이 엄청난 음모의 비밀이 유지되려면 사건 당사자들은 모두 죽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를 홍륜에게 알려줘 홍륜은 왕의 침소에서 철퇴를 휘두르게 되죠. 방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고려 말 개혁 군주 공민왕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의 개혁 - 고려의 개혁을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하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브레인스토어)

공민왕은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과 이 사실을아는 최만생을 없애고자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 밤, 침전에 들어간 최만생과 홍윤 등은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는 공민왕의 온몸을 칼로 마구 찔러댔다. 이들이 휘두른 칼에 공민왕은 뇌수가 벽에 튀어 붙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공민왕의 나이 45세였다. 그 뒤 최만생·홍윤·한안·권진 등은 왕을 시해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들의 나머지 친족도 모두 잡혀 유배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고려의 등불 같은 존재였던 공민왕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이처럼 처참하고 허무했다. 고려의 역대 제왕은 태조 이후로 원종까지 본국에서 시호와 묘호를 지었으나, 원나라 간섭을 받게 된 충렬왕대부터는 원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을 뿐 묘호는 붙이지 못했다. 공민왕대에 명나라가 강성해지자 고려의 대외관계도 크게 바뀌어 공민왕의 시호인 ‘공민(恭愍)’은 명나라에서 받은 것이었다. 본국에서는 공민왕에게 ‘경효(慶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그 뒤의 우왕과 창왕은 모두 폐시(廢弑)되어 시호가 없고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새 왕조 조선에서 추증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恭愍王] -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다 (인물한국사)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려 공민왕 고려 우왕 A는 B의 아버지다
고려 충숙왕 고려 공민왕 A는 B의 어버이이다
명덕태후 고려 공민왕 A는 B의 어버이이다
노국대장공주 고려 공민왕 A는 B의 아내이다
고려 공민왕 신돈 A는 B와 관련있다
고려 공민왕 천산대렵도 A는 B를 저술하였다
고려 공민왕 노국대장공주진 A는 B를 저술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330년 고려 공민왕이 출생하였다.
1351년 고려 제 3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1374년 고려 공민왕이 사망하였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공민왕", 『위키백과』online.
  2. 민병하, "공민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민병하, "공민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다지,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브레인스토어, 2015. 온라인 참조: "공민왕의 개혁", 학생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이다지,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브레인스토어, 2015. 온라인 참조: "공민왕의 개혁", 학생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공미라, 『한국사 개념사전』, (주)북이십일 아울북, 2010. 온라인 참조: "공민왕", 어린이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공민왕", 『위키백과』online.
  • "공민왕",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