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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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전40권. 정식명칭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인데, 흔히 줄여서 『고려도경』이라 부르고 있다.

책의 명칭에서 보듯이, 1123년 휘종(徽宗)의 명을 받고 사절로 고려에 와서 견문한 고려의 여러 가지 실정을 그림과 글로 설명했기 때문에 ‘도경’이라 칭하였다.

서긍은 개성에 한 달 남짓 머무르는 동안, 그의 견문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지었다.

책은 모두 28문(門)으로 나누었고, 다시 300여 항으로 세분하였다. 형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먼저 글로써 설명하고 그림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하였다.

서긍은 돌아가, 곧 이 책을 만들어 휘종에게 바치고 그 부본을 집안에 두었다. 휘종은 책을 보고 크게 기뻐해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을 내리고,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하였다.

1126년(인종 4)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 개봉(開封 : 汴京)을 함락시킬 때, 휘종에게 바친 정본이 없어졌다. 1167년(의종 21) 서긍의 조카 천(蕆)이 서긍의 집에 있던 부본에 의거해서 징강군(澂江郡)에서 간각(刊刻)하였다.

그 부본에는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이 없는 도경이 되고 말았다. 이 간본은 간행의 연대·장소에 따라 ‘건도각본(乾道刻本)’ 또는 ‘징강본(澂江本)’이라고도 한다. 고려 인종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아직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청나라 때 포정박(鮑廷博)이 편찬한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에 이 책을 수록·간행하면서 비롯되었다.

포정박은 발문에서 ‘건도(建都) 3년에 간행된 송판본과 간행 연대 미상의 고려본이 있으나 볼 수가 없고, 세상에 유전하는 것은 명나라 말기의 정휴중(鄭休仲)의 중간본(重刊本 : 鄭本)뿐이다.

이 정본(鄭本)은 탈자가 수천자에 달하고, 또 착간(錯簡)으로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 간본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포정박은 자기 소장의 사본과 정본을 참합(參合),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 지부족재본도 미비한 점이 많았다. 그는 발문에서 송판본의 출현을 기다려 그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말로써 아쉬움을 표하였다.

1910년대 초 일본인들의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지부족재본을 대본으로 활인(活印)하였고, 1932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가 『조선학총서(朝鮮學叢書)』의 하나로서 활인하였는데, 역시 지부족재본을 대본으로 하였다.

또한 건도 3년에 간행된 송판본 한 질을 소장하고 있던 중국 북경(北京)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서 1931년『천록임랑총서(天祿琳琅叢書)』 제1집의 하나로서 영인하였다.

이것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의 합불연경도서관(哈佛燕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에서 그것을 다시 영인, 널리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은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송나라 사람으로서 고려에 관한 기사를 남긴 것으로는 오식(吳栻)의 『계림기(鷄林記)』(20권), 왕운(王雲)의 『계림지(鷄林志)』(30권),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3권) 등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완전히 없어졌거나 겨우 그 일부분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어서 『고려도경』이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다른 고려사 관계자료들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한 기사를 많이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고려 인종 때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사회가 중국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으며, 또 어떻게 중국과 비교되고 특색지어졌는가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서술한 부분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자료의 이용에는 반드시 엄밀한 검토 및 비판과 취사선택이 곁들여져야 할 것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1091년 ~ 1153년)이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보고서다. 원명은 송 휘종의 연호인 선화(宣和, 1119년~1125년)를 넣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고 하며, 이를 줄여서 《고려도경》이라고 한다.

1123년(선화 5년) 서긍은 휘종의 명을 받고 고려 예종의 조의를 위해, 정사 노윤적(路允迪), 묵경(墨卿)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된다.

그들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통해 배를 타고, 입국하여 고려의 도성인 개경에 있는 사신의 숙소인 순천관에서 약 1개월을 머물다가 중국에 돌아온 후, 이야기를 보충해 다음 해 1124년 선화 6년 8월 6일[2] 이 책을 완성하고, 황제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이 책을 바쳤다.

원래 글과 그림이 같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한 것이나, 1126년 정강의 변을 거치며 완전판은 소실되었고, 1167년 송 효종 건도 3년 서긍의 조카인 서천(徐蕆)이 이 책을 다시 간행했지만,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

전 40권으로, 송나라인 서긍의 주관적인 시선이 어쩔 수 없이 어느정도 들어갔다는 한계는 있지만, 부족한 고려사를 보충해줄 귀한 당대의 자료라는 점에서,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의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 중 하나이다.

1124년(선화 6년) 8월 6일 지어진 서문에는 고려 예종의 조위를 위한 사신단에 도적(圖籍, 지도, 그림 등)의 수집 제작을 위해 고려로 간다는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중국과 다른 풍속 등 300여 조를 수집하여 책 40권으로 만들었고, 그림과 주석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또한 참고 서적인 《계림지》(鷄林志) 등을 참고 하여 건국부터 풍속 등까지 내용을 소개하고, 작업 과정 등을 설명하였다.

제1권에는 고려(고구려)의 건국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고려의 선조는 대개 기자 서여(胥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 주, 진을 지나 한 고제 12년 연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를 모아 상투 틀고 와서 오랑캐를 복속하고 차차 왕 노릇을 했다고 기록했고, 부여 신화를 설명하다 주몽이 등장하여 고구려라고 부르며, 국명을 고려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고씨 고려(고구려)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설명하고 있다.

제2권 세차(世次)에는 왕씨가 등장하여 당시까지의 고려 왕의 계보를 설명하고 있다. 즉,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정도가 아니라 진짜 고구려에서 고려로 그대로 이어져온 나라인데 왕조의 성씨만 바뀐 것으로 이해했다. 이는 이후 중국 사서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오류다.

제3권 성읍의 성읍(城邑), 봉경(封境)에선 유목 생활을 주로 하는 다른 오랑캐들과 달리 고려는 종묘와 사직, 고을과 마을, 높은 성첩을 두른 모양새가 중화를 닮았으니 이는 기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민거(民居)에선 개경 백성들의 주거 형태를 소개하고 있는데,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여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구멍 같다고 표현했다.

제8권 인물 편에는 북송을 중심으로 동남쪽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가 가장 왕성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척준경 등 만났던 벼슬아치들의 이름과 이자겸, 윤언식, 김부식, 김인규, 이지미 등은 따로 소개를 하고 있다.

제16권에는 국자감(國子監)을 비롯한 약국(藥局), 창름(倉廩), 영어(囹圄), 부고(府庫) 등의 인상적인 용도의 건물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고려는 다른 모든 물품은 물물교환을 통하여 교역을 했지만, 약을 사는 것은 반드시 전보(錢寶)를 통해서 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제17권 사우(祠宇)에서는 팔관재 행사를 설명하며 그 의식이 극히 성대하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는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흥국사, 국청사(國淸寺) 등의 사찰과 숭산묘(崧山廟), 동신사(東神祠), 오룡묘(五龍廟) 등의 사당을 소개하고 있다.

제23권 잡속2 한탁(澣濯)에는 옛 사서에 고려인은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며, 고려인들이 중국인들의 더러운 위생 상태를 비웃는다고 적어놨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냇물 가운데서 많이 하고, 남녀가 혼욕을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8] 어(漁)에는 미꾸라지(鰌), 전복(鰒), 조개(蚌), 진주조개(珠母), 왕새우(蝦王), 문합(文蛤), 붉은게(紫蟹), 굴(蠣房), 거북이다리(龜脚), 해조(海藻), 다시마(昆布)는 귀천없이 잘 먹는 해산물로 소개하였다.

제28권 공장1 와탑(臥榻)에서 고려 돗자리의 편안함은 오랑캐 풍속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국왕과 귀족, 사신 접대에서나 쓰이는 것이고, 서민들은 대부분 흙 침상이며, 땅을 파서 온돌[火坑]을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 고려는 겨울이 매우 추운데다 솜옷 같은 것이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제32권에는 기명 3(器皿 三)에서는 다기(茶俎), 술독(瓦尊), 등잔(藤尊), 도로(陶爐), 밥그릇, 옹기 등의 자기와 그릇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목차

제1권 건국 建國 제2권 세차 世次 제3권 성읍 城邑 제4권 궁궐문 門闕 제5권 궁전 宮殿 1 제6권 궁전 宮殿 2 제7권 관복 冠服 제8권 인물 人物 이자겸 / 윤언식 / 김부식 / 김인규 / 이지미 제9권 의례용품 儀物 1 제10권 의례용품 儀物 2 제11권 의장대 仗衛 1 제12권 의장대 仗衛 2 제13권 병기 兵器 제14권 기치 旗幟 제15권 수레와 말 車馬 제16권 관부 官府 제17권 사우 祠宇 제18권 도교 道敎 제19권 백성 民庶 제20권 부인 婦人 제21권 하급 관리 제22권 풍속 雜俗 1 궁정의 화톳불 / 초롱을 잡는 관리 / 시간을 알려주는 관리 / 고려 연회 / 공무 수행 / 답례 / 급사 / 말타는 부인 제23권 풍속 雜俗 2 한탁(澣濯, 목욕과 세탁) 종예(種蓺, 농업) 고기잡이 땔감 기록(刻記) 도축(屠宰) 무료 급식(施水) 토산품(土産) 토산품으로는 소나무, 인삼, 더덕, 복령과 같은 약재나 나물과 같은 것과 모시, 삼베옷, 비단, 모직물 등의 천 그리고 구리와 같은 광물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나전칠기와 같은 것은 세밀하고, 귀하다고 찬사를 한다. 밤이 복숭아만하며, 달고 맛있고, 사과나 참외, 복숭아, 배, 대추와 같은 것은 맛이 없고, 작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24권 사절의 행렬 節仗 제25권 조서를 받는 절차 受詔 제26권 연회 의례 燕禮 제27권 관사 館舍 제28권 장막류 供張 1 제29권 장막류 供張 1 제30권 생활용기 器皿 1 제31권 생활용기 器皿 2 제32권 생활용기 器皿 3 제33권 배 舟楫 제34권 바닷길 海道 1 제35권 바닷길 海道 2 제36권 바닷길 海道 3 제37권 바닷길 海道 4 제38권 바닷길 海道 5 제39권 바닷길 海道 6 제40권 동일한 문물 同文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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