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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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대표명칭 고니시 유키나가
한자표기 小西行長
생몰년 1558년-1600년
이칭 소서행장
시대 전국시대
국적 일본
배우자 기쿠히메(菊姬)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와쿠사(ワクサ)



정의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이었던 무장이다.

내용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대표적인 천주교도 영주이며,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부른다. 사카이(오사카 부근)에서 약재상을 운영하던 집안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小西隆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관을 지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584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도가 되었다.[1]

고니시 유키나가는 혼노지의 변란 이후,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아버지 류사와 함께 세토나이 해의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총책임이 되었다. 1588년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 히고노쿠니 우토 성의 영주가 되었으며,[2]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선봉을 맡아 한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였다. 이후 명나라의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적극적으로 강화 교섭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히데요시의 명으로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가 패주하였다.[3]

히데요시 사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편에 섰다가 패하여 처형되었다.[4]

김응서와 계월향에 얽힌 설화

임진왜란 당시 평양에 계월향(桂月香)이라는 유명한 기생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왜장이 평양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때 계월향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눈에 들어 그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계월향은 시중을 드는 한편으로 평양 조방장인 김응서(金應瑞)와 함께 그를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5]

고니시 유키나가는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고, 옆에 항상 칼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 방울이 달린 모기장 같은 것을 침상 위에 걸어놓고 잠이 들었다. 행여나 누군가가 몰래 들어와 방울을 울리게 되면 칼이 움직여 침입자를 죽이도록 한 것이었다.
계월향은 이 사실을 알아낸 후 솜과 재를 준비하였다.[6] 먼저 솜으로 방울을 틀어막아 울리지 못하게 하여 김응서가 들키지 않고 자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김응서가 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목을 내리치니 머리가 떨어졌다. 계월향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목 잘린 곳에 재를 뿌려 놓으니 목이 다시 붙지 못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목이 떨어진 채로 칼을 휘두르며 김응서계월향을 죽이려 하였다. 김응서계월향을 도우면서 재빨리 피하였으나 이미 고니시 유키나가의 칼을 맞은 후였다. 김응서는 도망치면서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계월향을 부축하여 평양성을 넘었는데 그녀는 결국 죽게 되었다.[7]

지식 관계망

  • 논개와 계월향과 김응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니시 유키나가 김응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고니시 유키나가 계월향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고니시 유키나가", 『두산백과』online.
  2. "고니시 유키나가", 『두산백과』online.
  3. "고니시 유키나가", 일본 인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고니시 유키나가", 일본 인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김기창, "김응서와 계월향",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6. 김기창, "김응서와 계월향",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7. 김기창, "김응서와 계월향",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