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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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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3호이다. 고려 왕건의 왕사 법경대사(法鏡大師) 경유(慶猷:871~921)의 부도비로, 944년(고려 혜종 즉위년)에 건립하였다. 용흥리 용암산 극락봉 남쪽 기슭의 오룡사지에 있는 법경대사 부도 바로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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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3호다. [[경유|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비로, 944년([[고려 혜종|혜종]])에 건립했다. 용흥리 용암산 극락봉 남쪽 기슭의 [[개성 오룡사|오룡사(五龍寺)]] 터에 있는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탑|법경대사탑(法鏡大師塔)]] 바로 옆에 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19600 오룡사 법경대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비의 형태는 지대석, 귀부, 비신, 이수를 갖춘 전형적인 비 양식으로, 지대석과 귀부는 화강석이고 비신과 이수는 점판암이다. 높이 3.4m, 지대석 길이 2.2m, 너비는 2m이다. 비신 앞뒷면에는 명문만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수는 섬세하게 조각된 4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있는 형상이며, 그 아래 2단 받침이 있다. 앞면 가운데 부분에 "법경대사(法鏡大師)"라는 비명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오룡지사(五龍之寺)"라는 절 이름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시 유명한 문장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승려 선경이 해서체로 썼다.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 중 한 명이었던 법경대사가 출가하여 당에 건너갔다가 귀국하여 왕사 예우를 받다가 입적한 일대기를 적었다. 뒷면에는 비를 건립하는 데 관련되는 사람들의 이름 및 관직이 명기되어 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19600 오룡사 법경대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오룡사 터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871(경문왕 11)~921(태조 4)]의 비. 비문은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승려 선경(禪扃)이 해서로 써서 대사가 입적한 23년 후인 944년(혜종 원년)에 세웠다.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춘 전형적인 비 양식으로서 귀부와 이수는 새김이 뛰어난데 비신 하단부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다. 행서로 쓴 음기 부분은 도속의 문도는 알아볼 수 있으나 추기 부분은 마모가 훨씬 심하여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많지 않다. 비문 내용은 법경대사가 탄생하여 출가하여 당에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여 가지산문의 형미(逈微), 성주산문의 여엄(麗嚴), 수미산문의 이엄(利嚴)과 함께 해동사무외대사로 불리며 활동하다 귀국하여 궁예도 만나고 태조를 만나 왕사의 예우를 받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음기에 상좌, 원주, 전좌, 도유나, 직세의 확대된 삼강직과 비사(碑事) 지리사(地理師) 등 비 제작을 담당한 승려가 명기되어 있고 태조와 여러 호족 그리고 최언위 등 중앙관료로 이루어진 재학제자(在學弟子)의 관위와 성명이 열거되어 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02 오룡사법경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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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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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1일 (목) 23:30 기준 최신판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開城 五龍寺 法鏡大師碑)
김응현, "오룡사법경대사보조혜광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한자 開城 五龍寺 法鏡大師碑
주소 개성시 용흥리 오룡사터
문화재 지정번호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3호
찬자 최언위(崔彦撝)
서자 선경(禪扃)
서체 해서(楷書)
승려 경유(慶猷)
건립연대 944년
승탑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탑



정의

개성시 용흥리 오룡사(五龍寺) 터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871-921)탑비.

내용

개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3호다.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의 비로, 944년(혜종)에 건립했다. 용흥리 용암산 극락봉 남쪽 기슭의 오룡사(五龍寺) 터에 있는 법경대사탑(法鏡大師塔) 바로 옆에 있다.[1]

높이 3.4m, 지대석 길이 2.2m, 너비는 2m이고, 비신 앞뒷면에는 명문만 있을 뿐 아무 장식이 없다.[2]

비문은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승려 선경(禪扃)해서(楷書)로 써서 대사가 입적한 23년 후인 944년(혜종 원년)에 세웠다.[3]

앞면 가운데 부분에 '법경대사(法鏡大師)'라는 비명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오룡지사(五龍之寺)'라는 절 이름이 전서체(篆書體)로 새겨져 있다.[4]

귀부(龜趺)와 비신, 이수(螭首)를 갖춘 전형적인 비의 양식이며, 비신 하단부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다. 행서(行書)로 쓴 음기 부분은 마모가 훨씬 심하여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많지 않다.[5]

비문

비문 내용은 법경대사가 탄생하여 출가하여 당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형미(逈微), 성주산문(聖住山門)여엄(麗嚴), 수미산문(須彌山門)이엄(利嚴)과 함께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로 불리며 활동하다 귀국하여 궁예(弓裔)도 만나고 태조를 만나 왕사(王師)의 예우를 받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한 것이다. 뒷면에는 비 제작을 담당한 승려를 명기했고, 태조와 여러 호족 그리고 최언위(崔彦撝) 등 중앙관료로 이루어진 재학제자(在學弟子)의 관위와 성명을 열거하고 있다.[6]


비문 보러가기
"오룡사법경대사비", 금석문, 『국가유산 지식이음』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지식 관계망

  • 최언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경유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개성 오룡사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개성 오룡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선경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주석

  1. "오룡사 법경대사비", 『두산백과』online.
  2. "오룡사 법경대사비", 『두산백과』online.
  3. "오룡사법경대사비", 금석문, 『국가유산 지식이음』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4. "오룡사 법경대사비", 『두산백과』online.
  5. "오룡사법경대사비", 금석문, 『국가유산 지식이음』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6. "오룡사법경대사비", 금석문, 『국가유산 지식이음』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