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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에 만든 경자자(庚子字)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지자 좀더 큰 활자가 필요하다하여 1434년 갑인년(甲寅年)에 왕명으로 주조된 활자이다. [[이천 | 이천(李蕆)]]·김돈(金墩)·김빈(金鑌)·[[장영실 | 장영실(蔣英實)]]·이세형(李世衡)·정척(鄭陟)·이순지(李純之) 등이 두 달 동안에 20여 만의 큰 중자(中字)인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를 만들었다.<ref>천혜봉,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32 갑인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420년에 만든 경자자(庚子字)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지자 좀더 큰 활자가 필요하다하여 1434년 갑인년(甲寅年)에 왕명으로 주조된 활자이다. [[이천 | 이천(李蕆)]]·김돈(金墩)·김빈(金鑌)·[[장영실 | 장영실(蔣英實)]]·이세형(李世衡)·정척(鄭陟)·이순지(李純之) 등이 두 달 동안에 20여 만의 큰 중자(中字)인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를 만들었다.<ref>천혜봉,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32 갑인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특징===
 
===특징===
갑인자 자본(字本)은 경연청(經筵廳)에 소장된 『효순사실 孝順事實』·『위선음즐 爲善陰騭』·『논어』 등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뒤에 세조가 된 진양대군 유(晉陽大君瑈)가 써서 보충하였다. 자체가 매우 해정(楷正: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하고 부드러운 필서체로 진(晉)나라의 위부인자체(衛夫人字體)와 비슷하다 하여 일명 ‘위부인자’라 일컫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활자인쇄술은 세종 때 갑인자에 이르러 고도로 발전하였으며, 이 활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개주(改鑄)되었다. 뒤의 개주와 구별하기 위해 특히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라 하였다.<ref>천혜봉,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32 갑인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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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자 자본(字本)은 경연청(經筵廳)에 소장된 『효순사실 孝順事實』·『위선음즐 爲善陰騭』·『논어』 등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뒤에 세조가 된 진양대군 유(晉陽大君瑈)가 써서 보충하였다. 자체가 매우 해정(楷正: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하고 부드러운 필서체로 진(晉)나라의 위부인자체(衛夫人字體)와 비슷하다 하여 일명 ‘위부인자’라 일컫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활자인쇄술은 세종 때 갑인자에 이르러 고도로 발전하였으며, 이 활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개주(改鑄)되었다. 뒤의 개주와 구별하기 위해 처음 제작된 활자를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라 하였다.<ref>천혜봉,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32 갑인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한글활자의 제작===
 
===한글활자의 제작===

2017년 8월 16일 (수) 17:10 판

갑인자
(甲寅字)
천혜봉, "갑인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갑인자
한자표기 甲寅字
시대 조선


정의

갑인자(甲寅字)는 1434년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이다.

내용

1420년에 만든 경자자(庚子字)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지자 좀더 큰 활자가 필요하다하여 1434년 갑인년(甲寅年)에 왕명으로 주조된 활자이다. 이천(李蕆)·김돈(金墩)·김빈(金鑌)· 장영실(蔣英實)·이세형(李世衡)·정척(鄭陟)·이순지(李純之) 등이 두 달 동안에 20여 만의 큰 중자(中字)인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를 만들었다.[1]

특징

갑인자 자본(字本)은 경연청(經筵廳)에 소장된 『효순사실 孝順事實』·『위선음즐 爲善陰騭』·『논어』 등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뒤에 세조가 된 진양대군 유(晉陽大君瑈)가 써서 보충하였다. 자체가 매우 해정(楷正: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하고 부드러운 필서체로 진(晉)나라의 위부인자체(衛夫人字體)와 비슷하다 하여 일명 ‘위부인자’라 일컫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활자인쇄술은 세종 때 갑인자에 이르러 고도로 발전하였으며, 이 활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개주(改鑄)되었다. 뒤의 개주와 구별하기 위해 처음 제작된 활자를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라 하였다.[2]

한글활자의 제작

제작

이 활자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글활자가 만들어져 함께 사용되었다. 만든 해와 자체가 갑인자와 전혀 다르므로 ‘갑인자병용한글활자’라고 하였다. 이 활자를 이용해 처음으로 간행한 책인 월인석보의 이름을 따 ‘월인석보한글자’라 하기도 한다.[3]

제작시기

이 한글활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수양대군 등이 세종의 명을 받고 1446년에 죽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447년 7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하여 국역한 『석보상절』과 그것을 세종이 읽고 지었다는 국한문본 『월인천강지곡』이 이 활자로 찍혀졌으므로 세종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4]

사용된 서적

이 외에도 『홍무정운역훈』의 소자(小字), 『동국정운』의 소자와 서문의 대자 등에 이 활자가 사용되었다.

의의

갑인자 한글활자는 획이 굵고 강직한 인서체(印書體)인 것이 특징이며, 세종이 우리의 글자를 제정하고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인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5]

시각자료

갤러리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갑인자 주자소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1434년
갑인자 이천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1434년
갑인자 장영실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1434년
갑인자 초주갑인자 A는 B를 포함한다
초주갑인자 월인석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초주갑인자 석보상절 A는 B와 관련이 있다
초주갑인자 월인천강지곡 A는 B와 관련이 있다
초주갑인자 홍무정운역훈 A는 B와 관련이 있다
초주갑인자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주석

  1. 천혜봉, "갑인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천혜봉, "갑인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천혜봉, "갑인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천혜봉, "갑인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천혜봉, "갑인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정선녀, 「初鑄甲寅字의 造形硏究」, 경기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5.
    • 김성수, 「갑인자 계열 금속활자 인쇄의 조판에 관한 연구」, 『人文科學論集』vol.42, 청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19-44쪽.
  • 단행본
    • 남권희 외, 『甲寅字와 한글활자』, 청주고인쇄박물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