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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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閑山大捷)
Sea battle.png
대표명칭 한산대첩
한자표기 閑山大捷
이칭 한산도대첩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2년(조선 선조 25) 7월
관련인물 이순신,원균,이억기
관련장소 한산도


정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조선 선조 25) 7월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의 주력부대를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내용

몰려오는 왜수군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이에 왜 수군은 용인 전투의 주역인 와키자카 하스하루(脇坂安治)의 정예 병력이 이끄는 전선 73척을 앞세워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또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2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합동훈련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전라좌수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한 후,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였다.

한산섬 유인 계획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板屋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완승

적을 넓은 한산 앞바다로 유인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자·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화포를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왜수군의 대장선인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 수군장 와키자카가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함으로써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도 사상자가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평가

이 해전을 진주성대첩(1592.10.5.-10.)·행주대첩(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부른다. 이 대첩은 왜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그 때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순신 한산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억기 한산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원균 한산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거북선 한산대첩 A는 B에 사용되었다 A ekc:isUsedIn B
학익진 한산대첩 A는 B에 사용되었다 A ekc:isUsedIn B
임진왜란 3대첩 한산대첩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임진왜란 3대첩 진주대첩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임진왜란 3대첩 행주대첩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공간정보

  • 이순신 장군 해전 전적지 전자지도

  • 임진왜란 3대첩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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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