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는 865년(경문왕 4)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며, 비문에서는 윤다의 출생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사의 법휘는 윤다(允多)요, 자는 법신(法信)으로 경사(京師) 출신이다. 그의 조부모는 귀족으로서 고관(高官)을 역임하였으며, 효도와 의리를 소중히 여겨 충효의 본이 되었다. 이렇게 가문을 지켰지만, 난리가 나서 몰락하였다. 그러나 명성과 칭송은 많은 사람들의 귀와 귀로 들렸고, 입과 입으로 옮겨 자자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성품이 온화하여 사람됨이 정결하였다. 어릴 때부터 속되지 않았으며 未長 (결락) 經. 성심성의로 불사(佛事)를 닦아 산악(山岳)과 같은 정기를 받아 잉태하고 또 어려움 없이 분만하였으니, 효감(孝感)을 말미암아 순산함이 마치 가을에 서리를 맞은 씀바귀가 쉽게 뽑히듯 산고 없이 함통(咸通) 5년 4월 5일에 탄생하였다. 대사가 처음 봉시(蓬矢)를 쏘는 날에 쌍주(雙柱)가 절륜(絶倫)하였다.
윤다는 7~8세에 이미 출가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는데, 거듭된 설득 끝에 마침내 출가를 하게 되었다. 비문에서는 이와 같은 갈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이 겨우 7~8세에 이미 불교에 몸을 던져 수도할 뜻을 품었으니, 부모에게 와문(蝸門)을 이별하고 선교(禪敎)에 입문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 부모는 더욱 애절하여 倍 (결락) 前. 더욱 애정에 얽혀 허락하지 못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한 대사(大師)는 잠연(潛然)히 실망하였고, 이를 본 어버이는 설득하되 “출가 수도하는 것도 이익이 없지 않으나 옹자(翁子)인 주매신(朱買臣)의 금의출세(錦衣出世)하는 것이 어찌 산승(山僧)의 취납(毳衲)인 누더기로 고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하면서, 슬피 울며 거듭 거듭 만류하여 뜻을 바꾸도록 하였으나, 어버이는 마침내 아들의 뜻이 굳고 굳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허락하였다.
출가 이후 윤다는 가야갑신수(伽耶岬新藪)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桐裏山)의 태안사(泰安寺)였다. 윤다는 태안사의 상방화상(上方和尙)이었던 여(如) 선사를 만나 그의 법맥을 전해 받게 된다. 여(如) 선사는 혜철(慧徹)의 사법제자(嗣法弟子)로. 혜철은 도의(道義), 홍척(洪陟)과 함께 당 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선을 배우고 귀국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동리산문(桐裡山門)을 개창한 승려이다. 즉 윤다는 서당 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시작하여 혜철(慧徹)과 여(如)로 이어진 법맥을 이어받은 승려로, 비문에는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서당 지장(西堂 智藏)은 혜철(慧徹)에게 전하였고, 혜철(慧徹)은 여(如) 선사에게 전하였으며, 여(如) 선사는 우리 대사에게 전하였으니, 즉 우리 대사께서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증손(曾孫)이다.[1] 대사께서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법을 이어받았으니, 수고롭게 서학(西學)을 하지 않고도 세상의 인연을 동성(東城)에 베풀었다. 참으로 실제(實際)가 본공(本空)한 줄 깨달았으며 (결락) 동인(東人)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특히 고려 때에는 태조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은 윤다를 궁궐로 초청하여 극진한 예로 대우하였는데, 당시의 군신들이 이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대사의 명성을 널리 들었기에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어찰(御札)을 가지고 스님이 계시는 동리산으로 보내어 청하되 “도덕을 앙모한 지 이미 오래되오니 스님의 거룩한 모습 뵙기를 원합니다”라 하면서 “스님께서는 이미 연로하셔서 보행하시기 힘들 터이오니, 말을 타고 구중(九重)으로 오신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시되 “노승(老僧)이 출가한 이래로 이제 80세에 이르기까지 아직 말을 탄 적이 없습니다. 산승(山僧)도 역시 왕의 국민이니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하겠습니까”하고 석장망혜(錫杖芒鞋)한 보행으로 연하(輦下)에 도착하니 임금이 크게 기꺼워하여 의빈시(儀賓寺)에 모시고 며칠 동안 편안히 쉬시게 한 다음, 상전(上殿)으로 영입하였고 임금 스스로 상(床)에서 내려와 공손히 영접하여 빈객(賓客)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군신들이 이를 보고 그윽이 놀랐다.
또한 윤다가 본래 그의 거처인 태안사(泰安寺)로 돌아가게 되자, 왕은 태안사(泰安寺)가 속한 전라도의 관찰사에게 토지와 노비 등을 시주하여 지속적으로 후원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스님의 간청을 들은 왕은 허락하여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가게 하고 본도(本道)의 수상(守相)에게 명하여 전결(田結)과 노비를 헌납하여 향적(香積)을 제공토록 하였으며, 외호의 가풍(家風)을 잊지 아니하고 항상 팔연(八行)의 예를 펴서 돈독한 단월이 되어 불교의 보존과 유지의 의무를 받아서 각기 진뢰(陳雷)를 본받았다.
태안사(泰安寺)로 돌아온 윤다는 제자들에게 계율을 스승처럼 여길 것을 당부하고 945년(혜종 2)에 열반에 들었으니, 세속의 나이는 82세, 승랍은 66세였다.
대사는 개운(開運) 2년전총(旃䝉) 대황락(大荒落) 2월 2일에 대중을 불러 놓고 말씀하되 “생(生)이란 유한한 것이며, 멸(滅) 또한 그 시기가 미정(未定)한 것이다. 내 이제 떠나고자 하니 각기 뜻있게 잘 살도록 하라. 부처님께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곧 너희들의 위대한 스승이라’ 하였으니, 나도 또한 이 말씀으로 너희들에게 당부하노니 너희들이 이를 잘 준수한다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하고 향을 피우고 염불을 하게 하고 합장하고 엄연(奄然)히 입적하니 속년(俗年)은 82세요, 승랍은 66이었다. 이 때 스님들은 통곡하면서 나루터의 다리와 큰 집의 들보가 이미 무너졌다 탄식하였고, 신백(神伯)들은 애통해 하면서 법륜(法輪)의 문이 영원히 닫혔다고 슬퍼하였다.
윤다의 입적 소식을 들은 왕은 윤다의 탑을 세우게 하고 그 경비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하였다. 또한 문인들이 탑에 따른 비명의 건립이 필요하다고 조정에 건의하자, 손소(孫紹)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