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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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의궁(於義宮) | |
대표명칭 | 어의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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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於義宮 |
이칭 | 상어의궁(上於義宮), 하어의궁(下於義宮), 용흥궁(龍興宮)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19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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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인조가 반정으로 왕이 되기 전에 머물던 잠저(潛邸)이자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이 태어나 봉림대군(鳳林大君) 시절에 머물던 곳이다.[1]
내용
역사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어의궁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인조의 잠저였던 '향교동(鄕校洞)' 어의궁이고, 다른 하나는 효종의 봉림대군 시절 잠저이면서 즉위 후 본궁(本宮)이 된 ‘어의동(於義洞)’의 어의궁이다. 조선 말기에 인조의 잠저를 ‘상어의궁(上於義宮)’이라 하고, 효종의 잠저를 ‘하어의궁’이라고 하였다. 향교동 어의궁은 인조의 어휘(御諱)를 봉안하는 곳으로 기능하였다. 어의동 어의궁은 효종 즉위 후 본궁으로 이름을 바꾸어 1907년 국가의 소유가 되기까지 왕실의 내탕고이자 가례를 치를 때 임시로 사용하는 별궁의 기능을 했다.[2] 조선시대 가례에 어의궁이 별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인조가 장렬왕후를 왕비로 맞이할 때부터였다. 그 후 관행으로 굳어져 정순왕후가 영조를 맞이할 채비를 갖춘 곳도 어의궁이었다.[3]
현재
1907년(융희 1) 궁내부령(宮內府令)에 의하여 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도장을 폐지하고 제실 재산 정리국 관제(帝室財産整理局官制)에 의하여 모든 재산이 제실관리국으로 넘어갔다. 현재 어의궁은 존재하지 않고 어의궁이 있던 자리에 비석만 남아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어의궁(於義宮) | 인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친영 | 어의궁(於義宮) | A는 B에서 거행되었다 | A edm:happenedAt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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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 12월 3일 | 인조와 장렬왕후의 친영을 어의궁에서 행하였다 |
1651년 12월 21일 | 현종과 명성왕후의 친영을 어의궁에서 행하였다 |
1680년 5월 13일 | 숙종과 인현왕후의 친영을 어의궁에서 행하였다 |
1696년 5월 19일 | 경종과 단의빈의 친영을 어의궁에서 행하였다 |
1727년 9월 29일 | 효장세자와 현빈의 친영을 어의궁에서 행하였다 |
1744년 1월 20일 |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친영을 어의궁에서 행하였다 |
1757년 6월 22일 | 영조와 정순왕후의 친영을 어의궁에서 행하였다 |
1851년 9월 27일 | 철종와 철인왕후의 친영을 어의궁에서 행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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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74970 | 127.002027 | 어의궁 표지석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195-11에 위치한다 |
주석
-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의 신부를 맞이하다』, 효형출판, 2001, 164쪽.
- ↑ 정정남, "어의궁", 검색,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의 신부를 맞이하다』, 효형출판, 2001, 164쪽.
- ↑ 정정남, "어의궁", 검색,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권오영 외, 『조선 왕실의 嘉禮』,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의 신부를 맞이하다』, 효형출판, 2001.
- 신병주, 박례경 외 2명 저, 『왕실의 혼례식 풍경 (조선 왕실의 행사 2)』, 돌베개, 2013.
- 임민혁, 『조선국왕 장가보내기』, 글항아리, 2017.
- 주남철, 『궁집』, 일지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