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단속사지
산청 단속사지 (山淸 斷俗寺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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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산청 단속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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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淸 斷俗寺址 |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
경내문화재 | 산청 단속사지 서삼층석탑, 산청 단속사지 동삼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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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 있는 절터.
내용
단속사(斷俗寺)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748년(경덕왕 7) 왕의 총신(寵臣) 이준(李俊/李純)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과, 763년(경덕왕 22)에 현사(賢士) 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하였다는 설이다.[1]
통일신라 이래의 고찰(古刹)로서 신라의 신행(神行)과 고려의 탄연(坦然)이 머물다가 입적했다.[2] 1568년(선조 1) 유생(儒生)들에 의해 불상(佛像)·경판(經板) 등이 파괴되고, 이어서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타버린 후 재건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다.[3]
정당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강회백(姜淮伯)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단속사에서 글을 읽으면 심은 매화가 경내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강회백이 지낸 벼슬인 정당문학의 이름을 따서 정당매(政堂梅)라 불렀는데, 매화나무가 말라 죽으면 그 후손들이 그 자리에 다른 매화를 이어 심었다고 하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추강 남효온(南孝溫)부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탁영 김일손(金馹孫), 지리산에 자주 올랐던 조선 중기의 문인 조식(曺植)까지, 이 정당매를 보고 지은 시가 남아 전한다.[4]
발굴 결과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 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서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비례와 균형이 조화로워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이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도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터에서 수습한 대감국사비 파편은 이후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5]
관련문화유산
지식관계망
- 산청 단속사와 관련 있는 진각국사 혜심의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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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단속사지 서삼층석탑 | 산청 단속사지 | A는 B에 있다 | |
산청 단속사지 동삼층석탑 | 산청 단속사지 | A는 B에 있다 | |
산청 단속사지 | 산청 단속사 | A는 B의 터이다 |
시각자료
주석
- ↑ "단속사",
『두산백과』online . - ↑ 곽철환, 『시공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참조: "단속사", 시공불교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단속사",
『두산백과』online . - ↑ "단속사지",
『위키백과』online . - ↑ "단속사지",
『위키백과』online .
참고문헌
- "단속사",
『두산백과』online . - 곽철환, 『시공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참조: "단속사", 시공불교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단속사지",
『위키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