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진체
동국진체 (東國眞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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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동국진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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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東國眞體 |
목차
정의
18세기에 만들어진 조선 고유의 서체이다.
내용
동국진체 등장의 배경
18세기, 곧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는 동안은 조선 어느 때보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고유색을 한껏 드러냈던 시기였다. ‘진경시대(眞景時代)’라고 할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된 문화와 병자호란 이후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우리 문화에 대한 우수성 자각은 조선이 곧 중화(中華)라는 조선 중화의식을 표방하였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감과 우수성 인식은 글씨 부분에서 ‘동국진체’로 발현되었다.[1]
이서의 옥동체에서 비롯되다
동국진체를 형성한 것은 옥동 이서(玉洞 李漵, 1662∼1723)에 의해서였다. 그는 남인 명문가 출신으로 성호 이익의 형이기도 하다. 이서는 허목(許穆)이 창안한 서체가 널리 이용되지 못하자, 스스로의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서법 정립을 시도하였다. 이것이 전통적인 진체(晉體)를 바탕으로 미법(米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창안된 옥동체(玉洞體)이며, 이를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칭하였다.[2]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된 동국진체
동국진체는 윤두서(尹斗緖)에게 전해졌고, 이는 다시 소론계 학자였던 윤순(尹淳, 1680∼1741)에게로 이어졌다. 이후 동국진체는 윤순의 서법을 계승한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는 윤순에게서 서예를 배우면서 왕희지의 서첩들이 모두 오래되고 변모를 거듭하여 왕희지 본색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서·예서를 통해 심획을 얻은 후 다시 왕희지의 서법으로 바르게 나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3]
위작 교본이 준 효과
그런데 이광사가 교본으로 삼은 왕희지의 전적은 위작이었다. 이를 진본으로 믿은 이광사는 이를 해서의 근본으로 삼아 서법 수련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조선 서체의 고유색이 더욱 강조되었고, 윤순의 서법에 배어있던 명조풍의 색을 바로잡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광사의 동국진체는 왕희지의 글씨체인 ‘진체(晉體)’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4]
지식 관계망
- 이광사-김정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동국진체 | 이서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동국진체 | 윤두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동국진체 | 이광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동국진체 | 윤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서 | 이익 | A는 형제 B가 있다 | A ekc:hasBrother B |
윤순 | 이광사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주석
- ↑ 임혜련, "동국진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임혜련, "동국진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임혜련, "동국진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임혜련, "동국진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문정자, 『동국진체 탐구』, 다운샘, 2001.
- 웹자원
- ,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 문화유산이야기,
『호남기록문화유산』online .
- ,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 문화유산이야기,
유용한 정보
- 김병헌, "진경시대는 없다.(2) - 한문 오역(誤譯)에서 출발한 서예 용어, 동국진체(東國眞體)!", 『조선일보』, 작성일: 2017년 10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