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헌
도헌(道憲) | |
대표명칭 | 도헌 |
---|---|
한자 | 道憲 |
생몰년 | 824년(헌덕왕 16)-882년(헌강왕 8) |
시호 | 지증(智證) |
호 | 도헌(道憲) |
탑호 | 적조(寂照) |
자 | 지선(智詵) |
성씨 | 경주 김씨 |
승탑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
승탑비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 道憲)은 824년(헌덕왕 16) 경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찬괴(贊瓌)이며 어머니는 윤씨(伊氏)다.
그의 세속 인연을 상고해 보면, 王都 사람으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 호는 道憲이요 자는 智詵이다. 아버지는 贊瓌이며 어머니는 伊氏이다. 長慶 甲辰年에 세상에 태어나 中和 壬寅年에 세상을 뜨니, 自恣한 지 43년이고 누린 나이가 59세였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탄생 설화
과거 승견불(勝見佛) 때의 승려였던 자가 자주 분노하여 용이 되었는데,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하니 받아줄 것을 간청하는 태몽을 꾸고 400일 만인 초파일에 대사를 낳았다.[1]
처음 어머니의 꿈에 한 거인이 나타나 고하기를, “나는 과거의 毘婆尸佛로서 말법의 세상에 중이 되었는데, 성을 낸 까닭으로 오랫동안 龍報를 따랐으나, 업보가 이미 다 끝났으니 마땅히 법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묘연에 의탁하여 자비로운 교화를 널리 펴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이내 임신하여 거의 4백일을 지나 灌佛會의 아침에 태어났는데, 일이 이무기의 復生故事에 징험되고 꿈이 佛母의 태몽고사에 부합되어, 스스로 경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고 삼가하게 하며, 가사를 두른 자로 하여금 정밀하게 불도를 닦도록 하였으니, 탄생의 기이한 것이 첫째이다.
태어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고, 짜서 먹이면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다. 문득 어떤 道人이 문앞을 지나다가 깨우쳐 말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도록 하려면 葷菜 및 肉類를 참고 끊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따르자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젖으로 기르는 이에게 더욱 삼가도록 하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였으니, 오랜 풍습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유년기
태어나자 며칠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는데, 도인이 찾아와 어머니가 육식과 파·마늘 등을 금할 것을 깨우쳤다. 그대로 했더니 젖을 먹기 시작했다.[2]
태어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고, 짜서 먹이면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다. 문득 어떤 道人이 문앞을 지나다가 깨우쳐 말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도록 하려면 葷菜 및 肉類를 참고 끊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따르자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젖으로 기르는 이에게 더욱 삼가도록 하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였으니, 오랜 풍습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출가수행
도헌은 9세에 출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범체대덕(梵體大德)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병보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의 병은 저절로 나았으나 그가 중병에 걸렸다. 어머니가 부처에게 자식의 병을 낫게 해주면 곧 출가를 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나았다.[3][4]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너무 슬퍼하여 거의 훼멸하였다. 추복승이 이를 가련히 여기고 논하여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 어렵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은혜를 갚으심에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울음을 거두고는 어머니께 불도에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린 것을 가엾게 여기고, 다시금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음을 염려하여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사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고사를 듣고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에 나아가 배웠다. 문득 하루는 마음이 놀라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잠시 뒤에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다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뵈오니 병도 뒤따라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완효서에 견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대사에게 痼疾이 전염되어 의원에게 보여도 효험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부처에게 이름을 예속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전의 꿈을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조심스럽게 네모진 가사를 몸에 덮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이 병에서 만약 일어나게 된다면 부처님께 아들로 삼아 달라고 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틀 밤을 자고 난 뒤에 과연 완쾌되었다. 우러러 어머니의 염려하심을 깨닫고, 마침내 평소에 품었던 뜻을 이루어, 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식을 부처에게 선뜻 내주도록 하고, 불도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인을 감동시킨 것의 기이함이 셋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840년(문성왕 2) 17세에 경의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5]
열일곱 살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선명한 것을 깨닫고 이를 더듬어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두고 구한 것이겠는가. 곧 발이 없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六度集經』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것으로 하여금 제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지는 것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도록 하였으니, 마음을 면려한 것의 기이함이 넷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활동
도헌은 계람산(鷄藍山) 수석사(水石寺)에서 고행 정진하여 혜은(惠隱)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았다.[6]
어렸을 때부터 노성한 덕이 풍부하였고, 게다가 戒珠를 밝혔는지라, 후생들이 다투어 따르면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큰 걱정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슬기롭게 하고자 해도 그것이 본보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모범이 되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큰 바다에 뜬 지푸라기가 제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음에랴. 그림자에게 형체를 쫓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비웃음을 살 꼴이 되리라” 하였다. 뒤에 산길을 가는데 어떤 나뭇꾼이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하는 데 어찌 덧없는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닫고는 와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으니, 鷄藍山 水石寺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얼마 뒤에 다른 곳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않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나, 능히 옮겨가는 것이 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책의 글자만 보는 이로 하여금 세 가지를 반성하게 하고 보금자리를 꾸민 자로 하여금 아홉 가지를 생각하도록 하였으니, 훈계를 내린 것의 이상함이 여섯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경문왕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도헌을 초청했으나 도헌은 이를 거절하였다.[7]
태사에 추증된 경문대왕께서는 마음으로는 儒·佛·道 3교에 융회한 분으로서 직접 대사를 만나 뵙고자 하였다. 멀리서 그의 생각을 깊이 하고, 자신을 가까이 하면서 도와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서한을 부쳐 말하기를, “이윤은 사물에 구애받지 않은 사람이고, 송섬은 작은 것까지 살핀 사람입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에 비유하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왕도 주위의 암거에도 자못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새가 앉을 나무를 가릴 수 있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황의 來儀를 아끼지 마십시오” 하였다. 근시 가운데 쓸만한 사람을 잘 골라 뽑았는데, 원성왕의 6대손인 立言을 사자로 삼았다. 이미 교지를 전함이 끝나자 거듭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시킴에 있어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앉을 수 있다’는 분부는 저를 위하여 잘 말씀하신 것이오니, 바라건대 그냥 이대로 있게 해주시어, 제가 거듭되는 부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더욱 진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그의 명예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전해졌으며, 대중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 아주 달라졌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864년(경문왕 4)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를 시납하자 그곳에 주석했다.[8]
함통 5년(864) 겨울 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을 자칭하며 當來佛에 귀의하였다. 대사를 공경하여 자신을 下生이라 이르고 上供을 후히 하였으며, 邑司의 영유인 賢溪山 安樂寺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 猿鶴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대사가 이에 그의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산의 이름이 賢溪이고 땅이 愚谷과 다르며 절의 이름이 安樂이거늘, 중으로서 어찌 주지하지 않으리오” 하고는, 그 말을 따라 옮겨서 머무른즉 교화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과 같이 더욱 고요하게 하고, 땅을 고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토록 하였으니, 진퇴의 옳음이 첫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도헌은 대아찬(大阿飡)[9] 김의훈(金嶷勳)의 명복을 기리고자 1장 6척이 되는 철불상을 주조하였다.
어느날 문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故 韓粲 金嶷勳이 나를 僧籍에 넣어 중이 되게 하였으니, 공에게 불상으로써 보답하겠노라” 하고는, 곧 1장 6척되는 철불상을 주조하여 銑을 발라, 이에 절을 수호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데 사용하였다. 은혜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로 돈독하게 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처럼 따르도록 하였으니, 보답을 아는 것의 옳음이 둘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867년(경문왕 7) 단의장옹주가 가람(伽藍)의 남쪽 농장과 노비의 문서를 절에 시주하게 하였다. 왕녀의 이와 같은 단월(檀越)에 감복한 도헌은 879년(헌강왕 5)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장(莊) 12구(區), 전(田) 500결(結)을 절에 예속시켰다고 한다.[10]
함통 8년(867) 丁亥年에 이르러, 시주인 옹주가 茹金 등으로 하여금 절에다 좋은 전지와 노비의 문서를 주어, 어느 승려라도 여관처럼 알고 찾을 수 있게 하고, 언제까지라도 바꿀 수 없도록 하였다. 대사가 그로 인해 깊이 생각해온 바를 말하되, “왕녀께서 法喜에 의뢰하심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佛孫인 내가 禪悅을 맛봄이 어찌 헛되이 그렇겠는가. 내 집이 가난하지 않은데 친척족당이 다 죽고 없으니, 내 재산을 길가는 사람의 손에 떨어지도록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문제자들의 배를 채워주리라”고 하였다. 드디어 乾符 6년(879)에 莊 12區와 田 500結을 희사하여 절에 예속시키니, 밥을 두고 누가 밥주머니라고 조롱했던가. 죽도 능히 솥에 새겨졌도다. 양식에 힘입어 정토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비록 내 땅이라 하더라도 임금의 영토 안에 있으므로, 비로소 왕손인 韓粲 繼宗과 執事侍郞인 金八元, 金咸熙에게 질의하여 正法司의 大統인 釋玄亮에게 미쳤는데, 심원한 곳에서 소리가 나 천리 밖에서 메아리치니, 太傅에 추증된 獻康大王께서 본보기로 여겨 그를 허락하시었다. 그 해 9월 南川郡의 僧統인 訓弼로 하여금 농장을 가리어 正場을 구획하도록 하였다. 이 모두가 밖으로는 군신이 땅을 늘리도록 도와주고, 안으로는 부모가 天界에 태어나도록 하는데 이바지한 것이다. 목숨을 이은 사람으로 하여금 仁과 더불게 하고, 歌妓에게 후히 상을 준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뉘우치도록 하였으니, 대사가 시주로서 희사한 것의 옳음이 셋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도헌은 심충(沈忠)이라는 자가 자신의 땅을 희사한 것을 계기로 희양산에 가서 절을 지었다. 881년(헌강왕 7)에는 국가에서 사역(寺域)을 획정하고 '봉암사(鳳巖寺)'라는 사액을 하사하였다.[11]
乾慧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沈忠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사의 이치를 분별하는 칼날이 선정과 지혜에 넉넉하고, 사물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천문과 지리를 환히 들여다 보며, 의지가 曇蘭처럼 확고하고 학술이 安廩과 같이 정밀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만나뵙는 예의를 표현한 뒤 아뢰기를, “제자에게 남아도는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에 있습니다. 鳳巖·龍谷으로 지경이 괴이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바라건대 禪寺를 지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내가 分身하지 못하거늘 어찌 이를 사용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나, 심충의 요청이 워낙 굳세고 게다가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前騶로 삼은 듯한 기이한 형상이 있었는지라, 곧 석장을 짚고 나뭇꾼이 다니는 좁은 길로 빨리 가서 두루 살피었다. 산이 사방에 병풍같이 둘러막고 있음을 보니,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 올라가는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처럼 두른 것을 보니,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에 대한 방비를 기본으로 삼았는데, 기와로 인 처마가 사방으로 이어지도록 일으켜 지세를 진압케 하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中和 辛丑年(881)에 前 安輪寺 僧統인 俊恭과 肅正臺의 史인 裵聿文을 보내 절의 경계를 표정케 하고, 이어 ‘鳳巖’이라고 명명하였다. 대사가 입적한 지 수년이 되었을 때, 산에 사는 백성으로 들도적이 된 자가 있어 처음에는 감히 법륜에 맞섰으나 끝내 감화하게 되었다. 능히 定心의 물을 깊이 헤아려서 미리 魔山에 물을 댄 큰 힘이 아니겠는가. 팔이 부러진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드러내도록 하고, 龍尾를 파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기를 제어하게 하였으니, 善心을 개발한 것의 옳음이 넷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헌강왕은 도헌을 월지궁(月池宮)으로 초빙하여 심요(心要)를 물었다.
太傅大王은 중국의 풍속으로써 弊風을 일소하고, 넓은 지혜로써 마른 세상을 적시게 하셨다. 평소에 靈育의 이름을 흠앙하시고, 法深의 강론을 간절히 듣고자 했던 터라, 이에 鷄足山에 마음을 기울이시어 鶴頭書를 보내 부르시며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小緣을 보호하다가 잠깐 사이에 한 해를 넘겨버렸으니, 안으로 大慧를 닦을 수 있도록 한번 와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임금의 琅函에서 “좋은 인연이 세상에 두루 미침은 (불보살이) 인간계에 섞여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것에 감동하여, 옥을 품고 산에서 나왔다. 車馬가 베날듯이 길에서 맞이하였다. 禪院寺에서 휴식하게 되자, 편안히 이틀 동안을 묵게 하고는 인도하여 月池宮에서 ‘心’을 질문하였다. 그 때는 섬세한 蔦蘿에 바람이 불지 않고 溫室樹에 바야흐로 밤이 될 무렵이었는데, 마침 달의 그림자가 맑은 못 가운데 똑바로 비친 것을 보고는, 대사가 고개를 숙여 유심히 살피다가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상쾌한 듯 흔연히 契合하고 말씀하시기를, “부처가 연꽃을 들어 뜻을 나타냈거니와, 전하는 遺風餘流가 진실로 이에 합치되는구려!”라고 하였다. 드디어 除拜하여 忘言師로 삼았다. 대사가 대궐을 나서자, 임금께서 충성스런 신하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타이르도록 하며, 잠시 머물러 주기를 청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牛戴牛라고 이르지만, 값나가는 바는 얼마 안됩니다. 새를 새의 본성에 따라 기르신다면 施惠됨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작별하기를 청하오니 이를 굽히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서글퍼하시며, 韻語로써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베풀어도 이미 머물지 않으니 佛門의 鄧侯로다. 대사는 ‘支遁이 놓아둔 鶴’이나, 나는 ‘속세를 초월한 갈매기’가 아니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 十戒를 받은 불자인 宣敎省副使 馮恕行에게 명하여 대사가 산으로 돌아가는 데 衛送토록 하였다.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루터기에서 떠나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물 만드는 것을 배우도록 하였으니, 세상에 나가서 교화하고 물러와 도를 닦는 것의 옳음이 다섯째이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입적
882년(헌강왕 8) 도헌은 현계산 안락사에서 나이 59세,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입적한 지 1년 후 희양산으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
겨울 12월 旣望의 이틀 뒤에 이르러 책상다리를 하고 서로 말을 나눈 끝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도다.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虎溪의 울부짖음과 같았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꺾으니 그 빛깔은 沙羅樹와 같았다. 외물이 감응함도 이같이 극진하거늘, 사람의 슬픔이야 헤아릴 만하다. 이틀 밤을 넘겨 賢溪山에 임시로 유체를 모셨다가, 1년 뒤의 그 날에 曦野로 옮겨 장사지냈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헌강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하사하였고, 885년(헌강왕 11)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내리고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탑비는 924년(경명왕 8)에 건립되었다.
太傅王께서 의원을 보내 문병하시고 파발마를 내려 齋를 지내도록 하셨다. 中正·公平하게 정무를 보시느라 여가가 없으시면서도, 능히 시종 한결같으셨으니, 보살계를 받은 불자요 建功鄕의 수령인 金立言에게 특별히 명하여, 외로운 여러 제자들을 위로하게 하고 ‘智證禪師’라는 시호와 ‘寂照’라는 탑호를 내리셨다. 이어 비석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대사의 행장을 적어 아뢰라 하시니, 문인인 性蠲 · 敏休 · 楊孚 · 繼徽 등은 모두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인지라, 묵은 행적을 거두어 바쳤다.
乙巳年(885)에 이르러 국민 가운데 儒道를 매개로 하여 황제의 나라에 시집가서 이름을 桂輪에 높이 걸고 관직이 桂下史에 오른 이가 있어 崔致遠이라고 하는데, 唐帝의 조서를 두 손으로 받들고 淮王이 준 衣段을 함께 가져 왔으니, 비록 이 영광을 봉새가 높이 나는 것에 비하기는 부끄러우나, 학이 청초하게 돌아온 것엔 자못 비길 만하리라. 임금께서 信臣으로서 淸信男인 陶竹陽에게 명하여, 대사의 문인들이 쓴 행장을 치원에게 주도록 하고 手敎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누더기를 걸친 東國의 禪師가 西方으로 遷化함을 이전에 슬퍼하였으나, 비단 옷을 입은 서국의 使者가 동국으로 귀환함을 매우 기뻐하노라. 불후의 대사가 인연이 있어 그대에게 이르게 된 것이니, 절묘한 작품을 아끼지 말아 장차 대사의 자비에 보답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희양산문
기존의 학자들은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 등의 문헌에 '희양산조사 산신현청도헌국사(曦陽山祖師 山神現請道憲國師)'라고 기록된 것을 토대로, 도헌을 희양산문의 조사 및 개산조로 보아왔다. 그러나 도헌과 긍양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에 의하면, 도헌은 긍양보다도 먼저 봉암사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극히 일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희양산문의 개산은 도헌의 법손이 되는 긍양이 935년에 희양산으로 가서 이미 허물어진 봉암사 터에서 새로 절을 일으켜 봉암사라 하고, 제자들을 일깨워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이루어졌다.[12]
지식관계망
- 지증대사 도헌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도헌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 도헌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A ekc:isStupaOf B |
도헌 | 영주 부석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범체 | 도헌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도헌 | 경의 | A는 B로부터 계를 받았다 | A ekc:wasOrdainedBy B |
도헌 | 수석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혜은 | 도헌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도헌 | 신라 경문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도헌 | 안락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도헌 | 김의훈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도헌 | 단의장옹주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도헌 | 심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문경 봉암사 | 도헌 | A는 B가 창건하였다 | A ekc:founder B |
도헌 | 신라 헌강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도헌 | 월지궁 | A는 B를 방문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도헌 | 안락사 |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도헌 | 양부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희양산문 | 도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824년 | 도헌 출생 |
832년 | 도헌은 영주 부석사로 출가하였다. |
840년 | 도헌은 구족계를 받았다. |
864년 | 단의장옹주가 현계산 안락사를 시납하자 도헌은 그곳에서 주석하였다. |
867년 | 단의장옹주가 도헌에게 토지와 노비를 시납하였다. |
879년 | 도헌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전장(田莊)을 희사하였다. |
881년 | 도헌이 희양산에 창건한 절이 봉암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
882년 | 도헌은 현계산 안락사에서 입적하였다. |
885년 | 헌강왕은 최치원에게 도헌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
924년 | 도헌의 비가 건립되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도헌",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지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개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개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 대아찬(大阿飡): 신라시대의 관등으로, 진골 이상인 자만이 받을 수 있고 중요 국사(國事)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공복(公服)은 자줏빛이었다. 출처:"대아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문경현, "단의장옹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개관",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 김영태, "희양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이지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80-338쪽.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도헌",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조용길, "지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증",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지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지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구산선문",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영태, "희양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