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수출선박
박서보-수출선박 | |
작가 | 박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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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연도 | 1973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건설/교통 |
분류 | 유화 |
소장처 | 미상 |
목차
정의
부산항에서 수출 화물을 컨테이너 선박에 싣고 있는 모습을 그린 박서보의 기록화.
설명
작품 소재
"수출은 국력의 총화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우리나라의 수출은 높은 신장률을 보였다. 1972년에 선박 수송화물량은 5천만톤 규모에 이르렀고 세계7위의 선박보유국이 되었다.[1]
1962년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된 이후 우리 나라의 수출은 1960년대의 10년간에는 25배, 1970년대의 10년간에는 21배의 초고속 신장세를 나타냈고, 1980년대에는 2.1배로 늘었다.
1947년을 기준으로 누적배율을 보면 1960년까지 1.3배로 저조하던 우리 나라의 수출은 1970년에 32배, 1980년에는 673배, 1990년에는 2,500배, 그리고 1996년에는 4,989배에 달했다. 이와 같은 수출의 증가는 해외시장지향적인 공업생산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민총생산의 성장에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계획을 처음 시작한 1962년의 경우 공산품을 제외한 1차 산품의 수출비중은 73%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뒤 수출규모의 확대와 더불어 1차 산품의 비중은 매년 감소하여 1996년에는 6.5%로 크게 떨어졌다. 반면에 공산품수출비중은 1965년부터 1차 산품을 압도하기 시작해 1996년에는 총수출의 93.5%에 달하였다. 이는 수출의 양적인 신장과 함께 수출산업고도화에 힘입은 결과였다.
이와 같은 공산품수출의 급격한 신장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나는 1971년까지만 해도 섬유·합판·신발류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어 중화학공업에 역점을 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1972∼1977) 중에는 자본 및 기술집약적인 비금속광물제품·철강제품·기계류 및 화학제품 등의 수출비중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4차부터 7차까지의 5개년계획 기간을 거치면서 중화학제품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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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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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수출선박 | 박서보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박서보-수출선박 | 국회사무처 | A는 B에 대여되었다 | A ekc:hasExhibitionAt B |
박서보-수출선박 | 국립서울현충원 | A는 B에 대여되었다 | A ekc:hasExhibitionAt B |
박서보-수출선박 | 부산항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A ekc:depicts B |
박서보-수출선박 | 수출진흥정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수출진흥정책 | 대한무역진흥공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수출진흥정책 | 수출드라이브정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수출진흥정책 | 경제개발계획 | A는 B과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수출진흥정책 | 수출자유지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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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박서보가 박서보-수출선박을 제작하였다 |
1979년 | 국회사무처가 박서보-수출선박을 대여하였다 |
1991년 11월 16일-1992년 11월 15일 | 국립서울현충원이 박서보-수출선박을 대여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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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00449 | 126.973200 | 국립서울현충원이 박서보-수출선박을 대여하였다 |
관련 민족기록화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대한뉴스 제989호-수출 100억불을 향하여(게시일: 1974년 6월 29일)
- 대한뉴스 제1109호-국산 자동차 수출(게시일: 1976년 11월 22일)
주석
-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민족기록화 경제편』, 1992, 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