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
이언적(李彦迪) | |
대표명칭 | 이언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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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彦迪 |
생몰년 | 1491-1553 |
본관 | 여강[驪江, 여주(驪州 |
이칭 | 이적(李迪) |
호 |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
자 | 복고(復古), |
부 | 이번(李蕃) |
모 | 이번 처 경주 손씨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또는 자계옹(紫溪翁)이다.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소신에서 호를 회재라 지었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이언적의 아버지는 이번이며 어머니는 양민공 손소(孫昭)의 딸이다. 경주 양동마을에 있는 외할아버지 손소의 서재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이번이 손소의 딸 경주손씨와 결혼하면서 여주 이씨는 경주의 명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언적은 1545년 좌찬성이 되었는데 이 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1]
학문과 저작활동
1517년(조선 중종 12) 영남지방 유생들 사이에 토론되었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 때 밝힌 그의 학설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언적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2]
의의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주었다.[3] 또한 사림의 조종으로서, 경주 고향 마을 옆에 그를 향사하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건립되었다. 서원의 뒤편에는 이언적이 권신 김안로의 전횡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거처하였다는 독락당(獨樂堂)이 자리하고 있다.[4]
지식 관계망
- 손소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이번 | 이언적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이번 | 이번 처 경주 손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손소 | 이번 처 경주 손씨 | A는 딸 B를 두었다 | A ekc:hasDaughter B |
여주이씨 독락당 | 이언적 |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이언적 | 이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언적 | 무극태극논쟁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무극태극논쟁 | 이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구인록 | 이언적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중용구경연의 | 이언적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봉선잡의 | 이언적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이언적 | 을사사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언적 | 양재역벽서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언적 | 경주 옥산서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주 옥산서원 | 여주이씨 독락당 | A는 B와 인접해 있다 | A ekc:isNear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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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 이언적이 무극태극논쟁에 참여하였다. |
1545년 | 이언적이 을사사화의 일로 좌찬성의 관직에서 물러났다. |
1547년 | 이언적이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