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방
원효방 (元曉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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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원효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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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元曉房 |
소장처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
관련인물 | 원효(元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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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개암사(開巖寺) 뒤에 위치한 석굴(石窟).[1]
내용
원효방(元曉房)은 개암사(開巖寺) 뒤 울금바위에 있는 석굴(石窟)로, 신라시대의 승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원효방의 형태가 어떤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토굴이나 석굴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문신 이규보(李奎報)가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남긴 글로 보아, 이 석굴이 원효방으로 추정된다.[2]
원효방과 관련한 이야기
원효(元曉)는 삼국 통일 이후 부안에 왔는데, 그 시기엔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이 원한과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백제 무왕의 왕사(王師)였던 묘련스님이 창건한 개암사 뒤 울금바위에 위치한 동굴에 원효가 왔다. 이 굴 옆에는 수백명이 머물 수 있는 대규모 굴들이 있었고, 울금바위 뒤쪽엔 백제부흥군들이 베를 짜 옷을 해 입었다는 베틀굴이 있었다. 원효는 이곳에서 가끔 저 김제평야로 나가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열었다. 야단법석에서 백성들과 함께 춤추며 원한과 갈등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상생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 사복(蛇福)도 이 토굴에 같이 머물렀는데, 원효에게 차를 끓어주려고 해도 물이 없었는데, 난데없이 바위틈에서 물이 새어나와, 달콤한 차맛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3]
다음날 부령현(扶寧縣) 현령(縣令) 이군(李君)과 다른 손[客] 6ㆍ7명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발을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짚 앞의 계단과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나 표범이 부여잡고 올라오려다가 올라오지 못한다 하였다. 곁에 한 암자(庵子)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의하면 뱀포[蛇包] 성인(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인데, 원효(元曉)가 와서 살았으므로 뱀포도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걱정을 하자 이 물이 바위 틈에서 문득 솟아났는데 물맛이 매우 달아 젖같아서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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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문선 제66권, 기(記), 『남행월 일기(南行月日記)』.[4] |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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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능가야산원효방병서 | 원효방 | A는 B를 묘사하였다 | |
원효방 | 원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원효방",
『원효의 유적지』online . - ↑ "원효방",
『원효의 유적지』online . - ↑ "원효방의 샘물",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남행월 일기",
『한국고전종합DB』online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