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휴정

Encyves Wiki
류인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23일 (목) 14:23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휴정(休靜)
BHST Monk1.png
대표명칭 휴정
한자 休靜
생몰년 1520년(중종 15)-1604년(선조 37)
청허자(淸虛子), 청허당(淸虛堂), 서산(西山)
법호 연초(演初)
현응(玄應)
성씨 최씨(崔氏)
본관 완산(完山)
속명 여신(汝信)
출신지 평안남도 안주
승탑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승탑비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완산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등이고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 [1]

Quote-left.png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서 그 계보가 완산(完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법에 저촉되어 안주(安州)로 옮긴 뒤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었다. 모친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하고는, 마침내 아이를 끌고가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이름은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간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 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불사(佛事)와 관계되는 일이었다.

Quote-right.png
출처: 장유(張維),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계곡집』. 온라인 참조: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출가수행

휴정은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남다른 바가 있어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傳燈)』·『염송(拈頌)』·『화엄경(華嚴經)』·『원각경(圓覺經)』·『능엄경(楞嚴經)』·『유마경(維摩經)』·『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2]

Quote-left.png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주목(州牧)이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내전(內典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出家)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낙발(落髮)을 하고 일선 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으니, 이때가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 35)으로서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영관대사(靈觀大師)를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Quote-right.png
출처: 장유(張維),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계곡집』. 온라인 참조: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활동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깨달음을 더욱 갈고 닦음)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3]

Quote-left.png

이로부터 관동(關東) 지방의 명산(名山)들을 뜬구름처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경사(京師)에 들어간 기회에 선과(禪科)에 응시해서 선발되었으며, 계속 승진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는 옷을 떨치고 풍악산(楓嶽山)에 들어가서 삼몽음(三夢吟)을 지었다. 일선 화상(一禪和尙)이 입적(入寂)할 즈음에 참언(讖言)을 남기기를 ‘누구엔가 주어야 할 나의 옷 한 벌, 나무 인형들이 푸른 눈빛 다투누나. 다리가 누군들 없을까마는, 남쪽 바다에서 누가 오리라.[單衣有債 木人爭靑 不是無脛來自南溟]’ 하였는데, 때마침 대사가 모처(某處)에서 이르러 화상의 사리(舍利)에 기도를 하니 신령스럽게 반응하며 환하게 빛이 났다. 대사가 비록 자취를 감추고 광채를 감췄으나 도인(道人)으로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결과 괜히 뻐기면서 아만(我慢)에 사로잡힌 무리들까지 소문만 듣고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장유(張維),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계곡집』. 온라인 참조: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1589년(선조 22) 『정감록(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정여립의난)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 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4]

Quote-left.png

기축년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요승(妖僧)이 무함하는 바람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나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 대답이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선묘(宣廟) 역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인견(引見)하여 어제(御製)의 절구시(絶句詩) 1수와 어화(御畫)로 된 묵죽(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는데, 대사가 그 즉시 시를 지어 바치며 사은(謝恩)을 하자 상이 더욱 칭찬을 하며 상을 후하게 내린 뒤 산사(山寺)로 돌아가게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장유(張維),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계곡집』. 온라인 참조: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그는 문도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선조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 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직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5]

Quote-left.png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행재(行在)에 가서 알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하니, 대사가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이 갸륵하게 여기면서 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에 대사가 여러 상족(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승병(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정(唯政)은 관동(關東)에서 일어나고 처영(處英)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나 권공 율(權公慄)과 병력을 합친 뒤 행주(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대사 자신은 문도(門徒) 1천 5백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이때 명(明) 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 이하 장좌(將佐)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시(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을 수복하고 나서 상이 장차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대사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가(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 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Quote-right.png
출처: 장유(張維),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계곡집』. 온라인 참조: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입적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6]

Quote-left.png

대사가 일단 묘향산(妙香山)에 돌아오고 나서는 무심하게 한가이 지내는 하나의 도인(道人)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 정월 23일에 장차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하려고 하였는데, 이날 가마를 타고서 폭설(暴雪)이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고 설법을 한 뒤, 방장실(方丈室)에 돌아와 얼굴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을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제(題)하기를 ‘팔십년 전에는 그가 나로 되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그로 되는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하고, 또 글을 써서 유정과 처영 등 두 문인과 작별을 하고는 가부좌(跏趺坐)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대사의 세수(世壽) 85세요, 선랍(禪臘)은 65세였다. 특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Quote-right.png
출처: 장유(張維),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계곡집』. 온라인 참조: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휴정 A는 B를 위한 비이다 1647년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해남 대흥사 청허당 서산대사탑 휴정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해남 대흥사 청허당 서산대사탑 해남 대흥사 A는 B에 있다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 휴정 A는 B를 위한 비이다 1632년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 금강산 백화암 A는 B에 있다
휴정 원적암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휴정 향산 보현사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휴정 정여립의난 A는 B는 관련있다
휴정 조선 선조 A는 B는 관련있다
휴정 성균관 A는 B는 관련있다
휴정 처영 A는 B의 스승이다
휴정 유정 A는 B의 스승이다
휴정 청허당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목정배, "휴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목정배, "휴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목정배, "휴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목정배, "휴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목정배, "휴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목정배, "휴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역사인물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