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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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씨(해남 윤씨(海南尹氏)) | |
대표명칭 | 해남 윤씨 |
---|---|
한자표기 | 해남 윤씨(海南尹氏) |
유형 | 종가 |
창립자 | 윤존부(尹存富) |
창립시대 | 고려 |
정의
해남윤씨(海南尹氏)는 해남의 종가이다.
내용
해남 입향과 부흥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인물인 윤존부(尹存富)로 알려져 있다. 해남 윤씨가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윤효정(尹孝貞)대로 이 시기 이후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파악된다.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은 당대 거부였던 해남 정씨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해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고 한다. 그는 백성이 어려울 때 사재를 털어 구휼하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 ‘적선지가(積善之家)’라는 칭송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1]
윤선도와 윤두서
윤효정이 바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고조부이다. 윤선도는 윤의중의 손자로, 광해군 4년에 처음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예송논쟁을 비롯한 각종 사화에 얽혀 긴 유배생활을 했다. 윤선도는 그보다 50년을 앞서 살았던 정철과 함께 ‘우리 문학의 쌍벽’을 이뤘는데, 현재 전해지는 그의 시조는 75수 정도이며 대부분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이 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뒤 은둔지로 택한 보길도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윤선도의 증손 윤두서는 숙종 때 극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며 심사정·정선과 함께 3재로 일컬어졌다. 그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이며, 그 외의 그림은 모두 보물 481호로 지정됐다.[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해남 윤씨 | 윤존부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해남 윤씨 | 윤효정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해남 윤씨 | 윤선도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해남 윤씨 | 윤두서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고산유고 | 윤선도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윤두서 자화상 | 윤두서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윤존부 | 윤효정 | A는 B의 선조이다 | A ekc:hasDescendant B |
윤효정 | 윤선도 | A는 B의 선조이다 | A ekc:hasDescendant B |
윤선도 | 윤의미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윤의미 | 윤두서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주석
- ↑ 김성희,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작성일: 2013년 02월 22일.
- ↑ 김성희, "파평윤씨, 해남윤씨, 칠원윤씨", 『세계일보』, 작성일: 2013년 02월 22일.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병삼, 「15~16세기 해남지방 재지사족의 형성과 성장에 대한 일고찰 : 해남정씨가의 혼맥 관계를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 문숙자, 「조선후기 양반가계(兩班家系)와 지역민(地域民)의 관계 및 그 변화양상 -해남윤씨 고문서를 중심으로-」, 『古文書硏究』 Vol.48, 한국고문서학회, 2016.
- 권수용, 「기획논문 -문중고문서를 통해 본 호남지역의 사회와 문화 : 해남윤씨 문중 문헌록 연구」, 『古文書硏究(』 Vol.38, 한국고문서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