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순조
순조(純祖) | |
대표명칭 | 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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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純祖 |
생몰년 | 1790년 6월 18일-1834년 11월 13일(음) 재위 1800년 7월 4일-1834년 11월 13일(음) |
본관 | 전주(全州) |
호 | 휘 공(玜), 호 순재(純齋) |
자 | 공보(公寶) |
출생지 | 창경궁 집복헌(昌慶宮 集福軒) |
사망지 | 경희궁 회상전(慶熙宮 會祥殿)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왕 |
배우자 | 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후궁 숙의 박씨(淑儀 朴氏) |
부 | 정조(正祖) |
모 | 수빈 박씨(綏嬪)朴氏) |
자녀 | 2남 4녀, 효명세자(孝明世子), 명온공주(明溫公主), 복온공주(福溫公主), 덕온공주(德溫公主), 영온옹주(永溫翁主) |
전임자 | 정조(正祖) |
후임자 | 헌종(憲宗) |
능묘 |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인릉(仁陵)37.4655982, 127.0795955 |
성격 | 인물 |
유형 | 왕 |
목차
정의
조선의 제 23대 왕이다.
내용
11세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안동김씨 여식을 중전으로 맞이하여 세도정치에 휩쓸렸다.
생애
1790년(정조 14)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순조는 후궁소생이었으나 문효세자(文孝世子)가 7세로 요절한 뒤 이때까지 정조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불렸다.[1] 1800년(정조 24) 11세 때 창덕궁 집복헌에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2] 같은 해 정조가 죽고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3]
왕이 되기는 했으나 11세로 어렸기 때문에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4]
1801년(순조 1)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신유박해는 사학(邪學)을 엄금하라는 정순왕후의 하교로 시작되었는데 많은 순교자가 발생되었다.[5] 이 과정에서 황사영(黃嗣永)이 서양에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달라 쓴 백서(帛書)가 발견되면서 사건이 커졌다.[6] 신유박해로 인하여 희생된 천주교인은 수백명에 이르며 남인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7]
정순왕후의 세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순조는 1802년(순조 2) 창덕궁 인정전에서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는데,[8] 이는 곧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치의 시작이 되었다. 순조가 혼인한 다음해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정순왕후가 죽자 노론 벽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심환지(沈煥之)의 관작이 추탈되고 김관주(金觀柱)가 삭직되는 등 벽파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9] 벽파가 축출된 뒤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점차 공고해졌고 민생은 불안정해졌다. 순조 재위기간에는 민란의 발생이 잦았는데 그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홍경래(洪景來)의 난이었다. 홍경래는 평안도 일대를 점령하고 관군과 대립하였으나 1812년(순조 12) 정주성이 함락되고 관군에 사살되어 반년에 걸친 난이 끝났다.[10] 홍경래의 난은 당시의 극심한 가뭄과 평안도지역 주민들의 소외감을 배경으로 국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순조 말엽에는 안동김씨의 세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이 있었다.[11]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시험의 횟수를 크게 늘렸고 자신의 처가였던 풍양조씨(豐壤趙氏)를 중용하면서 안동김씨를 견제하려 하였다. 효명세자는 국정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국가전례를 행하였으나 대리청정 3년만에 급사하여 안동김씨 견제는 결국 좌절되었다.[12]
사후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에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인 인릉(仁陵)이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헌릉(獻陵)과 함께 사적 제 194호로 지정되었다.[13]
거행 의례
순조관례책저도감의궤[14],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15], 순조국장도감의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조선 순조 | 순원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조선 순조 | 왕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조선 순조 | 책례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조선 순조 | 즉위식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800년 2월 2일 | 순조의 왕세자는 책례를 거행하였다 |
1800년 7월 4일 | 순조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8758 | 126.995310 | 창경궁 집복헌에서 순조의 왕세자의 책례을 거행하였다 |
37.578814 | 126.991084 | 창덕궁 인정문에서 순조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조선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의 모습[16]
주석
- ↑ 『正祖實錄』 14년(1649) 6월 丁卯: 「申時元子誕生于昌慶宮之集福軒」
- ↑ 『正祖實錄』 24년(1800) 2월 乙酉: 「王世子行冠禮冊禮于集福外軒」
- ↑ 『純祖實錄』 즉위년(1800) 7월 甲申: 「正宗大王二十四年夏六月己卯正宗薨」
- ↑ 『純祖實錄』 즉위년(1800) 7월 甲申: 「垂簾頒敎文」
- ↑ 『純祖實錄』 1년(1801) 1월 丁亥: 「大王大妃敎曰」
- ↑ 『純祖實錄』 1년(1801) 10월 戊申: 「左捕將任嵂右捕將申應周持邪學罪人黃嗣永凶書來詣閣外」
- ↑ 지두환, 『조선시대정치사』 3, 역사문화, 2013, 249—251쪽.
- ↑ 『純祖實錄』 2년(1802) 10월 辛亥: 「御仁政殿行冊妃禮」
- ↑ 『純祖實錄』 6년(1806) 4월 庚辰: 「三司合辭三次」
- ↑ 『純祖實錄』 12년(1812) 4월 癸亥: 「官軍收復定州」
- ↑ 『純祖實錄』 27년(1827) 2월 乙卯: 「命王世子代理庶務」
- ↑ 김문식,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56, 태학사, 2011, 71-75쪽.
- ↑ "서울 인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 ↑ 순조관례책저도감의궤", 의궤 검색,
『규장각 한국학연구원』online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규장각 한국학연구원』online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 "서울 인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정조실록』
- 『순조실록』
- 지두환, 『조선시대정치사』 3, 역사문화, 2013.
- 권내현, 「홍경래 난 연구의 쟁점」, 『한국인물사연구』 11, 한국인물사연구회, 2009.
- 김문식,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56, 태학사, 2011.
- 김태희,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大東漢文學』 43, 대동한문학회, 2015.
- 박현모, 「홍경래난을 통해서 본 19세기 조선정치」,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4-2,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5.
- 조광, 「辛酉迫害의 성격」, 『民族文化硏究』 13,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