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
설총(薛聰) | |
대표명칭 | 설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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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薛聰 |
생몰년 | ?-? |
자 | 총지(聰智) |
정의
신라 중대의 대학자.
내용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1] 6두품 신분으로 추정되며,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2]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 따르면, 설총은 9경(九經)을 신라 말로 읽고 가르쳤으며, 글을 잘 지어 비문(碑文) 여러 개를 남겼으나 고려시대에 이미 글자가 마멸되어 전하지 않게 되었다. 신문왕(神文王;681∼691) 때에는 『화왕계(花王誡)』를 지어 왕에게 인재를 발탁할 것을 간하였고, 719년(성덕왕 18)에는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지었는데 이때 관등은 나마(奈麻)였다.
『삼국사기』에는 설총이 1021년(현종 12)에 홍유후(弘儒候)로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 『고려사(高麗史)』에는 1022년(현종 13)에 추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개 『고려사』의 기록이 옳다고 본다. 한때 설총이 이두(吏讀)를 창시했다고 알려졌으나, 설총 이전의 금석문(金石文)에서도 이미 이두를 사용한 예가 있으므로, 창시가 아니라 집대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설총은 한당유학(漢唐儒學)을 중심으로 훈고학(訓古學)적 학풍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왕계(花王戒)
화왕계에 보이는 설총의 생각 설총이 지은 글은 벌써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무렵에도 거의 사라진 듯하다.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남았어도,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다. 아쉽게도 어떠한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남았다는 것이 아마도 ‘감산사 아미타여래 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 같은 비문이리라 여겨진다.
그런 설총의 글로 오로지 우리에게 전해는 것이 ‘화왕계’이다. 글 속의 상대역으로 신문왕이 나온다. 한여름 어느 날 왕이 설총과 마주하였다. 높고 밝은 방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오늘은 오래 내리던 비가 비로소 개고 바람이 시원하구나. 비록 맛있는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고상한 담론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하겠느냐. 그대는 반드시 색다른 이야기도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나를 위하여 말해 주지 않는가?”
왕의 발언이 이런 정도라면 왕과 설총 사이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설총은 예전에 꽃의 왕이 처음 들어 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며 말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신문왕과 설총 사이에 먼저 실제 대화가 있고, 이것을 글로 옮겼다고 보인다. 글은 한마디로 우화에 가깝다. 꽃밭을 하나의 나라로 설정하고, 꽃의 왕과 신하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는데, 세상의 사람의 그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향기로운 꽃동산에 꽃의 왕이 심어져 푸른 장막으로 보호 받고 있었다. 봄이 와서 피어난 꽃은 온갖 다른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다. 역시 꽃의 왕이라 할만 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왔다. 왕을 배알하려는 목적이었다. 여기서 두 꽃이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은 꽃이다. 간들간들 걸어와 얌전하게 앞으로 나오며 왕에게 말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사내로 설정되었다.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었다. 한눈에도 볼품없는 꽃임을 알게 한다. 게다가 힘없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걸어와 말했다.
“저는 서울 밖의 한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의 빛깔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름은 할미꽃이라고 합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생기는 것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상자 속의 준비물에는 반드시 양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극약이 있어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 말에 생사와 삼베 같은 좋은 물건이 있다 해도, 왕골과 띠 풀 같은 천한 물건을 버리지 않아서, 모든 군자들은 만의 하나 결핍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습지요.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이 두 꽃을 두고 왕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장미와 같은 화려함의 극치에 마음을 둘 것인가, 할미꽃과 같은 볼품없지만 결핍에 대비할 상대를 고를 것인가. 선택을 채근하는 신하에게 왕은 차라리 솔직한 제 심정을 밝힌다. 할미꽃 사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어여쁜 여자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라면서, 은근히 장미 쪽에 기울어 있다. 그러자 사내가 왕 앞에 다가서 따끔한 충고 한 마디를 날린다.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왔더니,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무릇 임금 된 사람치고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풍당은 낭서 정도로 지내다 흰 머리가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도리가 이러하였거늘 저인들 어찌 하겠습니까?”
풍당(馮唐)은 한 나라 때 사람인데, 중랑서장(中郞署長)이라는 낮은 계급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올바른 정치를 해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좀체 그 이상 진급하지 못했다.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임금은 마땅히 어질고 실속 있는 신하를 얻어야 하며, 신하는 행여 쓰임 받지 못하여도 크게 낙심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의 인식체계가 보이는 결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설총 [薛聰] - ‘화왕계’로 유학의 가르침을 전하다 (인물한국사)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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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요석공주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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