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
이재(李縡) | |
대표명칭 | 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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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縡 |
생몰년 | 1680년-1746년 |
본관 | 우봉(牛峯, 지금의 황해도 금천) |
호 | 도암(陶菴)·한천(寒泉) |
자 | 희경(熙卿)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도암집(陶菴集) |
부 | 이만창(李晩昌) |
모 | 민유중(閔維重)의 딸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내용
이재는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서 숙종의 처조카이자 노론을 대표하는 핵심인물들의 가까운 친인척으로써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이채(李采)의 조부이기도 하다.[1]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으며, 『단종실록(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716년 '가례원류(家禮源流)’시비가 일어나자 노론 측에 가담하여 소론을 통박했고, 1719년에는 영남균전사(嶺南均田使)로 나가 토지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1722년 임인옥사(壬寅獄事) 때 중부 만성이 옥사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1725년(영조 1) 여러 번 소명을 받고 소를 올려 군흉(群凶)을 몰아낼 것을 청했으나 영조는 탕평책(湯平策)에 열중한 나머지 그의 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이후 용인의 한천에 살면서 오원(吳瑗) ·임성주(任聖周)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등 많은 학자를 길러내어 훗날 북학(北學)사상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3]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송명흠(宋命欽)·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4]
예학(禮學)에도 밝아서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時)』,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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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 임성주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이재 | 김원행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이재 | 송명흠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김창협 | 이재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이재 | 이채 | A는 B의 조상이다 | A ekc:isLineageKinOf B |
시각자료
주석
- ↑ "이재",
『위키백과』online .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참조:"이재",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이재",
『두산백과』online . - ↑ 이재호, "이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응백외,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참조:"이재",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더 읽을거리
- 논문
- 김동준,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삶과 시문학」, 『한국한시작가연구』Vol.14, 한국한시학회, 29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