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민란
고부민란(古阜民亂) | |
대표명칭 | 고부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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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古阜民亂 |
유형 | 농민운동 |
시대 | 조선 |
날짜 | 1894년 1월 |
관련인물 | 전봉준, 조병갑 |
관련단체 | 동학 |
관련장소 | 고부 |
정의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1]
내용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趙秉甲)은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하여 주고도 추수기에 강제로 수세(收稅)하였다. 민란의 직접적인 불씨가 된 것은 만석보(萬石洑)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되었다.[2]
조병갑이 새로 군수로 부임해 오자 동진강 하류에 필요하지도 않은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이를 이유로 농민들에게서 고율의 수세를 징수함으로써 700여 섬이나 착복하였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봉준은 동학접주인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여 봉기를 맹약하였다.[3]
이듬해인 1894년 2월 10일 전봉준 등은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새로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4] 그리하여 1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동학농민운동 | 고부민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동학농민운동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동학농민운동 | 2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2차 동학농민운동 | 우금치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전봉준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개남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손화중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