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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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31일 (화) 10:18 판 (2차 동학농민운동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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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Joseon uibyeong.png
대표명칭 2차 동학농민운동
한자표기 東學農民運動
이칭 2차 동학운동, 2차 동학농민혁명, 2차 동학혁명, 2차 농민봉기
유형 농민운동
시대 조선
날짜 1894년 9월-12월
관련인물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관련단체 동학
관련장소 황토현, 백산성


정의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내용

2차 동학농민운동 봉기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대원군이 섭정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1]
그리하여 1894년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고, 전라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는 남접과 서포 소속 동학군과 농민군 총 20만명이 궐기하였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12월 10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했다. 전봉준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2]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894년 12월 30일 밤에 체포되어 12월 28일 한양으로 압송[3]되었고, 1895년 4월 23일 김덕명·성두환·최영남·손화중과 함께 처형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동학농민운동 고부민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동학농민운동 1차 동학농민운동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동학농민운동 2차 동학농민운동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전봉준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개남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손화중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2차 동학농민운동 우금치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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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주석

  1. "동학운동", 『doopedia』online, 두산백과.
  2.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동학운동",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