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엄
조엄(趙曮) | |
대표명칭 | 조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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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趙曮 |
생몰년 | 1719-1777 |
본관 | 풍양(豊壤) |
호 | 영호(永湖) |
자 | 명서(明瑞)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해사일기 |
대표직함 | 이조판서 |
부 | 조상경(趙商絅) |
모 | 이정태(李廷泰)의 딸 |
정의
조엄(趙曮, 1719-177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조중운(趙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도보(趙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海槎日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1]
활동사항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1752년 이전에도 음보로 세자익위사시직을 지낼 정도로 뛰어났으며 과거 급제 후에는 정언, 대사헌·부제학·승지·이조참의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2]
- 조창의 설치와 조운 확장
1758년에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3]
- 고구마 보급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하였다.[4]
- 평안도의 적폐 청산
177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