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화약
전주화약(全州和約) | |
대표명칭 | 전주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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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全州和約 |
시대 | 근대 |
날짜 | 1894년 06월(고종 31) |
관련인물 | 전봉준,홍계훈 |
관련장소 | 전주성 |
목차
정의
1894년 5월에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과 조선 정부가 맺은 화약(和約).[1]
내용
청·일군의 개입
1894년 4월 무장(茂長)의 봉기로부터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전라도 전역과 충청도로 확대되었고,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를 점령하였다. 양호초토사 홍계훈(洪啓薰) 지휘하의 정부군은 6월 1일 전주 교외에 도착하여 수차례에 걸쳐 전주성을 공격하여 수 일간의 공방전 끝에 쌍방은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2]
이에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청나라의 군사파견은 일본군 개입의 구실로 이용되어 6월 9일에는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3]
폐정개혁안 제시
전주성 점령 후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던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청과 일본의 군사주둔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화약을 맺기로 하였다. 화약의 조건으로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1894년 5월 7일 전주화약이 맺어졌다.[4]
동학12개조폐졍개혁안 1. 동학교도와 정부와의 숙원을 없애고 공동으로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
||
출처: "동학십이개조폐정개혁안", |
=집강소 설치
전주화약이 맺어진 후 해산한 농민들은 각 고을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안을 토대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약속을 불이행하였고, 일제의 침입과 함께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5]
농민들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다시 봉기하였고 이로 인해 전주화약은 파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와 태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지도자인 전봉준이 1894년 12월 2일 체포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좌절되었다.[6]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전봉준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동학농민운동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동학농민운동 | 2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홍계훈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폐정개혁안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집강소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청일전쟁 | 1차 동학농민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갤러리
- Yoon-young Yi - 동학농민혁명 제122주년, 전주화약기념제(게시일 : 2016년 06월 11일)
주석
- ↑ "전주화약",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전주화약",
『다음백과』online . - ↑ "전주화약",
『다음백과』online . - ↑ "전주화약", 시사상식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전주화약", 시사상식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전주화약", 시사상식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