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 (해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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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DH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10일 (화) 00: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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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의 해독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6년에 개최한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2016.6.29~12.31)'도록 161쪽을 참고 활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원문 중 옛 한글의 경우 웹브라우저 및 시스템의 문자세트(character set) 표현상 한계로 인해 표시가 불완전할 수 있으며, 각 내용상의 사소한 교정은 별도의 언급 없이 적용하였습니다.


한글팀 참의 황여일 처 숙부인 이씨 유서 01 표지.jpg


원문 해석문
슌티 팔년 신묘[順治八年辛卯] 삼월 념일[三月念日] 손 듕[子孫中] 유셔[遺書] 순치 8년 신묘(1651) 3월 20일 자손에게 주는 유서(遺書)
이 유셔[遺書] 가옹[家翁]의 젼실 [前室子] 승지[承旨] 댱[長子]로셔 아이 업매 가옹[家翁] 겨신 제 일[每日] 니시 네 동 듕[同生中]의 식[子息]을 여 대종[大宗] 계후[繼後子] 라 시던 거시나 승지[承旨]도 어버[1] 의 유언[遺言]을 허디 못여 셋재 아 듕헌[中憲]의 아 셕[石來] 양[養子]로 뎡여 승지[承旨] 부인[夫人] 사라신 제 여다가 기더니 부인이 몬져 죽거 부인 박시[朴氏] 거상[居喪]을 승지 니펴 삼년 디낸 후의 혼인[婚姻] 제 녜장[禮狀]의 승지 제 식으로 녯(禮)대로 일홈 두어 셩혼[成婚]여 일가의 며이지이 여 잇다가 블의[不意]예 승지 주근 후의 승지 죵쳡[婢妾] 분개[分介] 아 셔위[石右]란 놈이 본시 패역[悖逆]읫 놈으로셔 일됴[一朝]애 제 아븨 명을 거려 반부[叛父子]로 탈뎍[奪嫡]려 고 미련 식 듕민[中敏]이 달래여 댱방[次長房]으로션 봉[奉祀]란 아라고 승지 봉[奉祀]란 셔위[石右] 달라 여 듕민이 셔우과 동심[同心]여 매양[每樣] 던 셜계[設計] 너힌 모랴 손셰[孫婿] 조우딘려 내 샹언[上言]을 뎡라 엿다니 이 멀매 긔별[寄別]을 듣디 못엿다니 경인년[庚寅年] 월[四月]의 샹언[上言] 뎡 닙안[立案]을 가져 와시니 조션[祖先]의도 의탁[依託]  겨시고 나도 가옹[家翁]의 유언[遺言]을 내죵[乃終]내 일우니 깃브미 비  업  아냐 국법[國法]이 금뎐[金典] 오매 셔우의 흉긔[凶計] 햐슈[下手] 못게 되니 일언 당[多幸][2]이 업서 쳔츄만셰[千秋萬歲]예 의심[疑心]은 업거니와 셔위 지극키 흉[凶] 놈이니 혀 내 주근 후의 듕민[中敏]이 달래여 내 말인 톄 지어내여 고텨 흉모[凶謀] 낼 쟉이면 우로 나라 소기고 아래로 조션[祖先]을 더러이올 니 금셕[金石] 닙안[立案] 잇거니와  다시 고 도로 내 본의[本意] 친필[親筆]로 실여 그놈을 알게 노니 내 나히 팔십지인[八十之人]이 됴셕[朝夕]의 [死生]을 믿디 못매 혀 내 후[死後]의 거 위조[僞造] 발뎡[發呈]려 거내 손듕[子孫中]의 션셰[先世] 과 내 유언[遺言]을 조차 듕민[中敏]이란 븨효[背孝]로 논단[論斷]고 셔우[石右]란 반부죄[叛父罪]과 항것 잡 죄과 나라 소긴 죄로 각각 구유[俱由]여 뎡관[呈官]여 죗대로 쳐티[處置]고 이내 글시로 손[子孫]이 표[標][3]게 언문[諺文]으로 친히  거시니 손손[子子孫孫]이 브경봉(不輕奉行事) 이 유서는 남편[4]의 전처 자식인 承旨[5]가 장자로서 아들이 없으므로 남편이 살아계실 때 매일 말씀하시되, “너의 동복(同腹) 동생 가운데에 자식을 잘 골라서 대종(大宗)의 계후자(繼後子)를 삼으라”고 하셨다. 아들인 승지(황중윤)도 아버지의 유서를 헐어버리지 못하여 셋째 아우 중헌(中憲)의 아들 석래(石來)를 양자(養子)로 정하여 승지 부인이 살아계실 때 데려다가 길렀는데 박씨 부인이 (남편보다) 먼저 죽었다. 부인 박씨의 서상(居喪)을 승지가 (석래에게) 상복을 입혔고, 삼년 지낸 뒤 (석래가) 혼인할 때 예장(禮狀)[6]에 승지가 제 자식으로 예(禮)에 따라 이름을 적고 성혼(成婚)하여 한 집에서 며느리까지 데리고 살았다. 뜻하지 않게 승지가 죽은 후에 승지의 비첩(婢妾) 분개의 아들 석우(石右)라는 놈이 본래 패역(悖逆)한 놈으로서 하루아침에 제 아버지의 명을 거슬러 반부자(叛父子)가 되어 탈적(奪嫡)하려 하고 미련한 자식 중민(中敏)을 꼬셔서 차장방(次長房)[7]으로서 선대 봉제사는 아우 중민이 맡고 승지의 봉제사는 석우에게 달라고 하거늘, 중민이 석우와 합심하여 매양하던 설계(設計)를 너희인들 모르겠느냐? 손서(孫壻) 조우진에게 내 상언(上言)을 올려라 하였더니 거리가 멀어서 기별을 듣지 못하였다. 경인년[8] 사월에 상언을 올려 입안(立案)을 받아 가져왔으니 조선(祖先)께서도 의탁할 데 계시고 나도 남편의 유언을 마침내 이루게 되니 기쁨이 비할 데 없을 뿐 아니라 국법이 금전(金典)과 같아서 석우의 흉계를 실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런 다행함이 없다. 천추만세에 의심할 것은 없지만은 석우는 지극히 흉악한 놈이니, 행여 내가 죽은 뒤에 중민이를 꼬여서 내가 한 말인 양 지어내어 고쳐서 흉모(凶謀)를 낸다면 위로는 나라를 속이고 아래로는 선조를 더럽힐 듯하다. 금석같은 입안(立案)이 있지만 또 다시 입안을 받도록 내 본뜻을 친필로 써 실행하여 그놈을 알게 하고자 한다. 내가 나이 팔십이 된 노인이라 아침저녁으로 생사를 믿지 못한다. 행여 내가 죽은 뒤에 (석우가) 위조문서를 가지고 정소(呈訴)하려 하거든 내 자손들은 선세의 뜻과 내 유서에 따라 중민이는 베효(背孝)로서 논단(論斷)하고 석우는 반부죄(叛父罪)와 상전 잡아넣은 죄와 나라 속인 죄로 각각 사유를 갖추어 呈官하여 죄에 따라 처리한다. 이 내 글씨로서 자손들에게 표(증거)가 되도록 언문(諺文)으로 친히 쓰는 것이니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가벼이 봉행하지 않을 일이다.
황참의(黃參議) 쳐(妻) 슉부인(淑夫人) 니시(李氏) (着圖書) 황참의 처 숙부인 이씨(착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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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아버 : 아배. 아버지의 경상도 사투리.
  2. 당[多幸] : 當幸?.
  3. 표[標] : 徵表. 혹은 徵表이 表.
  4. 남편 : 黃汝一(1556~1622). 호는 海月, 공조참의를 지냈다 하여 그 후손들은 자칭 타칭 참의댁이라 하였다.
  5. 黃中允(1577~1648). 호는 東溟. 蔚珍 출신. 海月 黃汝一 1556~1622)의 아들이다. 23세 되던 선조32년에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시험지 끝에 ‘근대(謹對)’라는 글자를 빠뜨려 낙방이 되었다. 29세 되던 선조 38년에 생원 및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36세 되던 광해군 4년에 과거에 합격했다. 벼슬은 春秋館編修官, 持平, 右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조 때 주화론자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방면되었으나, 그 후부터 벼슬은 하지 않았다. 문집으로는 東溟集 8권이 있으며, 소설 작품으로 <達川夢遊錄>, <四代紀>, <玉皇紀>, <天君紀> 등의 한문소설이 전하고 있다.(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2. 25)
  6. 예장(禮狀) : 혼인할 때 신랑 측이 신부 가문에 보내는 婚書.
  7. 次長房 : 四代奉祀를 하는 宗子가 사망한 뒤 代가 끊어지지 않은 支孫 중 항렬(行列)이 가장 높은 연장자를 最長房, 그 다음을 次長房이다. 이는 종자가 사망했을 경우 그 제사가 차례로 옮아가는 순서이기도 다. 이것을 神主遞遷 또는 位牌遞遷이라고 한다. 종손으로부터 처음에 遷祀된 지손이 최장방이며, 최장방에서 代盡하면 역시 나머지 지손 가운데서 최장방에게로 천사한다. 최장방을 기준으로 볼 때 천사의 다음 차례를 맡게 될 자손을 次長房이라고 한다. 최장방천사 [最長房遷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시전, 한국학중앙연구원)
  8. 경인년 : 1650년, 효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