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조선)
보우(普雨) | |
대표명칭 | 보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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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普雨 |
생몰년 | 1509(중종 4)-1565(명종 20) |
호 | 허응(虛應), 허응당(虛應堂), 나암(懶庵) |
법명 | 보우(普雨) |
정의
조선 중기의 승려.
내용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 출가하고,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백담사(百潭寺) 등에서 수행하였다.[1]
1548년(명종 3)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어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550년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1551년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권신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 등의 도움으로 300여 개의 사찰을 나라의 공인(公認) 정찰(淨刹)로 만들었으며,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승려 4,000여 명을 선발하여 자격을 인정하는 한편, 과거에 승과(僧科)를 두게 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2]
1555년 9월 각종 제도적 장치의 결과로 종단이 안정된 기반을 갖게 되자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렀다. 1560년에 다시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 직책을 맡았으나, 운부사(雲浮寺)에서 왕자의 태봉(胎峯)이 있는 산의 나무를 베어 사원을 증축한 일에 연루되어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봉은사를 물러나 세심정(洗心亭)에 머물렀다. 같은 해 12월 다시 선종판사로 임명되어 봉은사에 머물렀다.[3]
1565년 4월에 회암사 중창사업을 마치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설하였지만, 같은 달문정대비가 죽자 한계산 설악사(雪岳寺)에 은거하였다.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함에 따라 1565년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4]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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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보우",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보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서윤길, "보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서윤길, "보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