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미
형미(逈微)() | |
대표명칭 | 형미(逈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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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yeongmi |
생몰년 | 864(경문왕 4)-917(경명왕 1) |
시호 | 선각대사(先覺大師) |
휘 | 형미(逈微) |
탑호 | 편광(遍光) |
성씨 | 최씨(崔氏) |
본관 | 박릉(博陵) |
출신지 | 무주(武州: 현재의 광주) |
승탑비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1] | ||
출처: |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2]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3]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4]
출가수행
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5] | ||
출처: |
878년 장흥 보림사로 출가하여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의 제자가 되었으며, 882년 구례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중화(中和) 2년에 이르러 화엄사 관단(官壇)에서 비구계를 받을 때 대사가 계단에 올라가 제자리에 앉는 순간 백색 무지개 기운이 법당을 가득 덮었다.[6] | ||
출처: |
입당유학
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7] | ||
출처: |
형미는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고자 하였고,[8] 89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형미를 비롯하여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등 신라 출신의 승려 네 명이 운거도응대사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모두 인가를 받았고, 이들은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즉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으로 일컬어졌다.[9] 이들 사무외대사는 이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10]
귀국 및 활동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형미는 905년 무주로 돌아온 후,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위갑사에서 8년간(905-912) 주석하였다.
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秦韓]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해안에 이르렀다.[11] | ||
출처: |
그러던 중 912년 궁예가 왕건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과 무주(지금의 광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하였다. 궁예는 형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친견하였고, 나주 지역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태봉(泰封)으로 회군할 때 형미를 태봉의 수도 철원으로 함께 모시고 갔다.[12][13]
입적
철원에서 궁예의 우대를 받던 형미는 917년 궁예 반대세력과의 연결을 의심받아 궁예에게 피살되었으니,[14]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세였다.
이때에 개울과 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세계의 빛이 변하였다.[15] | ||
출처: |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미를 기리기 위하여 산사(山寺)를 짓고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을 편광령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였다.
동영상
-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_#001~004 (방송일: 2002.11.08)
관련항목
node | relation | no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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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를 위한 비이다 | 형미(逈微) |
체징(體澄) | 는 -의 스승이다 | 형미(逈微) |
운거도응선사(雲居道膺禪師) | 는 -의 스승이다 | 형미(逈微) |
형미(逈微) | 는 -에 포함된다 |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 는 -에 포함된다 |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 는 -에 포함된다 |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 는 -에 포함된다 |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
형미(逈微) | 는 -에서 주석하였다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
형미(逈微) | 는 -에서 수행하였다 |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
형미(逈微) | 는 -에서 계를 받았다 | 구례 화엄사(求禮 華嚴寺) |
궁예(弓裔) | 는 -와 관련있다 | 형미(逈微) |
왕건(王建) | 는 -와 관련있다 | 형미(逈微) |
왕건(王建) | 는 -의 이름을 지었다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에 있다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지었다 | 최언위(崔彦撝)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썼다 | 유훈율(柳勳律) |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새겼다 |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
참고문헌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각주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
- ↑ 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2쪽.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324쪽.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4쪽.
-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5쪽.
- ↑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
- ↑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
- ↑ 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255쪽.
-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
-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 ↑ 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형미를 태봉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9쪽.
-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