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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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2일 (월) 18: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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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笏)
심동신(沈東臣], 1824~?)의 홀, 문화재청,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복식․자수편』, 문화재청, 2006, 123쪽.
대표명칭
한자표기
이칭별칭 수판(手板)
구분 기타
착용신분 백관, 종친, 왕세자
착용성별 남성



정의

백관이 대사(大社), 경사일(慶事日), 원단(元旦), 동지(冬至) 및 조칙(詔勅)을 반포하거나 진표(進表)시에 또는 국가의 제사에 손에 드는 판의 의미로, 군주 앞에 나아가 어떤 일을 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물이다.[1]

내용

장방형(長方形)의 판으로, 잡는 아랫부분은 비단으로 만든 싸개[甘伊]로 감쌌다.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였다. 본래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는 용도였으나 후대로 내려 오면서 형식적으로 바뀌었다. 은 제도상으로는 국말까지 변함이 없다.[2] 신하는 군주 앞에서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킬 일이 있을 때, 손으로 직접 가리키면 예의가 없다고 여겨 홀을 들어서 가리키도록 했다.[3] 명대 문무백관용 수판의 명칭이 로 정해져, 1393년(홍무 26)에 1~5품은 '상아(象牙)', 6품 이하가 나무[木]이며, 조선은 명의 제도에 기준해 1~4품은 상아(象牙), 5~9품은 나무(木)를 사용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왕세자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백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종친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백관의 조복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백관의 제복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제복 상의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제복 하상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조복 상의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조복 하상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쪽
  2.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124쪽.
  3.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80쪽.
  4. 임명미, 「韓·中·日 3국의 圭·笏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지』 V.51, N.2. 한국복식학회, 2001, 5~25쪽.
  5.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 류희경,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2007.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 임명미, 「韓·中·日 3국의 圭·笏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지』 V.51, N.2. 한국복식학회, 2001.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최규순, 『中國歷代帝王冕服硏究』, 동화대학출판부, 2007.
  • 최규순, 「이 시대의 진정한 ‘紳士’를 위하여」, 『전통 의생활 연구』, 제 2집, 단국대학교 전통복식연구소, 2008.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홍나영ㆍ신혜성ㆍ이은진 지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 교문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