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전투
금산전투(錦山戰鬪) | |
대표명칭 | 금산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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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錦山戰鬪 |
이칭 | 금산싸움 |
유형 | 전투 |
시대 | 조선 |
날짜 | 1592년 7월 |
관련인물 | 고경명, 조헌, 영규 |
정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부터 8월 사이에 의병장 고경명·조헌이 거느린 의병이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두 차례의 전투.
내용
금산전투는 고경명(高敬命)(1533~1592)과 조헌(趙憲)(1544~1592)이 지휘한 의병 부대 및 곽영(郭嶸)이 지휘한 관군과 왜군 사이에 일어났다. 고경명 등이 왜군과 대적할 때 능성현 출신 문홍헌(文弘獻)은 동향의 구희(具喜)[1552~1593] 등과 함께 의병 300여 명을 모아 금산으로 올라갔다. 문홍헌 외에 화순 출신 의병장 최경회(崔慶會)[1532~1593]의 조카 최홍재(崔弘載)[1506~?] 역시 수백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금산으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화순 지역 의병장들이 금산에 도착하기 직전에 고경명 부대가 패전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산성 전투 [錦山城戰鬪]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금산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한성을 향하여 북상하면서 병력을 모아 전주에 이르렀을 때는 7,000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가 전주를 출발하여 여산에 이르러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고경명은 당초 계획을 바꾸어 왜군은 물리친 후 북상하기로 하였다. 이때 전라도방어사 곽영은 금산 서쪽의 진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고경명은 곽영에게 금산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할 것임을 통보하고 협조를 부탁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한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지휘하는 왜군은 7월 8일 전주로 진출하려다가 이치전투에서 권율의 조선군에게 크게 패하고 금산으로 철수하여 15,000여의 병력이 수성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고경명의 의병은 곽영의 관군과 함께 진산을 거쳐 7월 9일 금산에 도착하여 금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성 위에서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려고만 할 뿐 적극적인 대항을 하지 않았다. 이는 전날 이치전투에서 대패하여 병력 손실이 많아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고경명은 금산성 서문을 공격 목표로 잡고 의병의 주력을 서문 공격에 투입하였다. 그때 고바야카와는 조선군의 관군이 허약한 것을 보고 동문으로 출진하여 관군을 공격하였다. 왜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관군은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동요한 의병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이 틈을 타서 일제히 공격하여왔고, 고경명은 끝까지 군대를 독려하며 대항하였으나 마침내 전사하였고 많은 의병과 관군이 희생을 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 실패로 비록 금산성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왜군의 전주 진출을 저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산전투(1차) [錦山-]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승병장 영규(靈圭)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해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의 의병은 근왕(勤王: 싸움에서 군사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일)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隆景)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순찰사는 조헌의 전공을 시기해 직권으로 의병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는 등 갖은 수단으로 방해하였다. 이에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700명 가량의 의사(義士)만이 끝까지 남아 생사를 같이 하기를 원했다. 이 보다 앞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금산에서 전사하고, 남평현감(南平縣監) 한순(韓楯)의 군사 500명도 패퇴, 전사하였다.
8월 16일에 조헌은 할 수 없이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떠났다. 이 때 별장 이산겸(李山謙)이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에서 패배해 후퇴해오면서 “왜군은 정예대군이라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는 대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조헌은 “국왕이 당하는 판에 신하가 어찌 목숨을 아끼랴” 하면서 그의 만류를 거절하였다.
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과 공주목사 허욱(許頊)도 조헌의 위험을 무릅쓴 전투를 말리면서 기일을 정해 함께 협공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조헌은 오히려 그들의 머뭇거림을 분하게 여기며 700명만을 거느리고 고개를 넘었다.
조헌은 승병장 영규에게 글을 보내 다시 승군과 합세해서 8월 18일 새벽 진군해서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관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한편,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모든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힘껏 싸워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
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버렸다. 이로써 호남·호서 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해 9월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의사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였다.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선비들이 매년 이에 시향을 받들어왔으며, 1971년 정부에서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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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김진봉, "금산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2년 11월 29일. -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online . 온라인 참조: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진봉, "금산전투",
유용한 정보
- "평양성전투(1차)",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평양성전투(2차)",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평양성싸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