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헌안왕
신라 헌안왕(新羅 憲安王) | |
대표명칭 | 신라 헌안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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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新羅 憲安王 |
생몰년 | -861년 |
이칭 | 의정(誼靖), 우정(祐靖) |
시대 | 신라시대 |
국적 | 신라 |
부 | 김균정(金均貞) |
모 | 조명부인 |
자녀 | 문의왕후 김씨 |
전임자 | 신라 문성왕 |
후임자 | 신라 경문왕 |
정의
신라 제47대왕.
내용
헌안왕은 조카인 문성왕 때에 서불한(舒弗邯)의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857년(문성왕 19) 음력 9월 문성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문성왕은 병이 위중해지자 숙부인 헌안왕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헌안왕이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고 관후하고 인자하여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정사를 도와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보살펴 기를 만하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고 전해진다.[1]
헌안왕 때에도 신라에는 자연재해가 잇따라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했다. 858년(헌안왕 2)에는 음력 4월에 서리가 내렸으며, 음력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가뭄으로 겨우내 곡식이 귀해져 백성들이 굶주리자 헌안왕은 859년(헌안왕 3) 각지로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구제했고, 제방을 쌓을 것과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를 내렸다.[2]
헌안왕(憲安王)은 즉위 전인 문성왕대에 성주사(聖住寺) 시주인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에게 제자의 예를 행하며 향과 차를 예물로 보내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헌안왕은 즉위 후에도 무염에게 글을 보내어 도움이 될 말을 청하여 자신의 생활과 통치의 좌우명으로 삼는 등 통치의 사상적 이론을 불교 승려로부터 제공받고자 하였다. 또 무주(武州) 보림사(寶林寺)에서 선승(禪僧)으로 활동하며 교화를 펼치고 있던 체징(體澄)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와 특별한 연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이후 체징을 859년에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기게 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는 것을 후원하기도 했다.[3]
861년(헌안왕 5) 정월에 병이 위중해지자 당시 16세였던 사위 김응렴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 달 29일에 죽었다. 오늘날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경주 헌안왕릉은 사적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다.[4]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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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헌안왕 | 신라 경문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헌강왕 | 신라 문성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무염 | 신라 헌안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체징 | 신라 헌안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가지산문 | 신라 헌안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주석
- ↑ "헌안왕",
『두산백과』online . - ↑ "헌안왕",
『두산백과』online . - ↑ "헌안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헌안왕",
『두산백과』online .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