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연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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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연행록 | |
| 한자명칭 | 戊午燕行錄 |
|---|---|
| 영문명칭 | A Korean journal of Seo Yumun’s trip to Yanjing (Qing) |
| 작자 | 서유문 |
| 작성시기 | 1799년(정조23) |
| 간행시기 | 조선후기 |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 청구기호 | 2-4518 |
| 유형 | 고문헌 |
| 크기(세로×가로) | 31.2×21.5㎝ |
| 판본 | 필사본 |
| 수량 | 6冊 |
| 표기문자 | 한글, 한자 |
개요
헌종이 1839년 10월 18일 천주교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 서울과 지방의 백성에게 내린 윤음, 한문본과 언해본
텍스트
삼절연공겸사은사三節年貢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연행하였던 서유문徐有聞, 1762~1822의 한글 연행록이다. 1798년정조22 10월부터 1799년정조23 4월 2일 복명하기까지의 일정을 일기체로 기록하였다. 제1권은 서장관에 임명된 뒤의 준비과정부터 쌍양점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 동안의 일기이다. 제2 권은 쌍양점을 떠나 북경에 도착한 시점까지의 기록이다. 제3권부터 제5권까지는 1798년 12월 23일부터 1799년 2월 6일까지 북경에서 체류한 기간의 일기이다. 제6권은 회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귀국 후 복명하기까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무오연행록』은 북경에 체류할 당시의 기록이 중심인데,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의 연행록보다는 관찰의 폭이 제한되어 있다. 이는 서유문의 연행록이 서장관으로서의 공식 기록이라는 점과 건륭제가 상중喪中인 관계로 북경 유람이 자유롭지 못했던 상황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작품은 18세기의 희소한 한글 연행록이라는 점과작가 특유의 대청관對淸觀이 잘 나타난 기행문학으로서 의의가 있다. 장서각에 소장된 한문본 『무오연행록戊午燕行綠』 2-4519은 한글본의 1/5정도 분량으로 내용이 축약되었고,서장관의 이름을 서지수徐志修로 쓴 것을 후에 서유문徐有聞으로 고친 흔적이 있다. 따라서 한글본을 토대로 한문본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1]
시각자료
관련항목
| 중심 | 연결정보 | 대상 |
|---|---|---|
| 무오연행록 | 인물 | 서유문 |
| 무오연행록 | 개념 | 삼절연공겸사은사 |
| 무오연행록 | 개념 | 서장관 |
| 무오연행록 | 인물 | 서지수 |
공간정보
|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 무오연행록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37.39197 | 127.054387 |
시간정보
|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
| 무오연행록 | 간행년 | 1799년(정조23) |
참고문헌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12-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