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국문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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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국문 유서 | |
한자명칭 | 宣祖 國文 諭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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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King Seonjo’s writing to his people written in Korean while he was in retreat at Uiju during the Imjin Wars." |
작자 | 선조 |
작성시기 | 1593년(선조26) |
간행시기 | 조선후기 |
기탁처 | 권이도 기탁 |
소장처 | 부산시립박물관, 보물 제951호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80×40㎝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章 |
표기문자 | 한글, 한자 |
개요
임진왜란 중 선조가 의주에 피신해 있을 당시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교서
텍스트
임진왜란 중 선조가 의주에 피신해 있을 당시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교서이다. 장지에 10행 429자로 작성했으며,‘유서지보諭書之寶’가 세 군데 찍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조선인이 포로가 되어 왜군에 협력했는데, 선조는 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교서를 반포함으로써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해 돌아오게 하였다. 이 유서는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한 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權卓, 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침투해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포로 100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이 교서는 권탁의 후손이 보관하다가 1854년철종5 김해시 흥동에 어서각御書閣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보관되었다. 유서의 내용은 강제로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설득해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 자료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사용된 한글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1]
시각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1] 한글전시도록
관련항목
중심 | 연결정보 | 대상 |
---|---|---|
선조 국문 유서 | 선조 | |
선조 국문 유서 | 사건 | 병인사옥 |
선조 국문 유서 | 개념 | 임진왜란 |
선조 국문 유서 | 개념 | 유서지보 |
선조 국문 유서 | 장소 | 김해성 |
선조 국문 유서 | 인물 | 권탁 |
선조 국문 유서 | 장소 | 어서각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선조 국문 유서 | 소장처 | 부산시립박물관 | 35.131369 | 129.092174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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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국문 유서 | 간행년 | 1593년(선조26) |
참고문헌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9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