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

Encyves Wiki
Nur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25일 (월) 19:38 판 (새 문서: {{사건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청산리대첩 |한자표기=靑山里大捷 |영문명칭= |이칭= |유형=전투 |시대=조선 |날짜=1920년 10월 21일~...)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대표명칭 청산리대첩
한자표기 靑山里大捷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920년 10월 21일~1920년 10월 26일
관련인물 김좌진,나중소,이범석,홍범도
관련단체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
관련장소 청산리



정의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1]

내용

배경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특히 1919년 8월에 김좌진, 이장녕(李章寧), 김규식(金奎植), 최해(崔海), 정훈(鄭勳),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가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1919년 8월 이후에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도 독립군의 침공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그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2]

전개

10월 20일

이와 같은 활발한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는 직접 일본군을 간도로 침공시켜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간도로 침입한 일본군 중 동지대(東支隊)는 1920년 10월 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에 김좌진 장군은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21일 아침 백운평으로 들어왔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기습하였고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위부대 200명이 전멸하였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타(山田) 연대도 독립군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독립군을 협공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퇴각하였다. 북로군정서 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북로군정서 군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였다.
이 시각에 일본군은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하였다. 홍범도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3]

10월 22일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 군은 인근 천수평(泉水平)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어랑촌에 주둔한 아즈마(東正彦) 부대에 알렸다. 공격을 예상한 북로군정서 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북로군정서 군과 완루구에서 승리한 홍범도부대 등 약 1,500명이 총동원되었으며 승리를 거두었다.[4]

10월 24일-25일

10월 24일에는 북로군정서 소속 한 부대가 천보산 부근에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10월 25일에는 홍범도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홍범도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골짜기에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미 독립군은 공격을 대비해 매복 중이었다. 독립군은 즉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5]

결과 및 평가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손수광-청산리싸움 청산리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A ekc:depicts B
손수광-청산리싸움 청산리대첩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손수광-청산리싸움 김좌진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북로군정서 청산리대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좌진 북로군정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나중소 북로군정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범석 북로군정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대한독립군 청산리대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범도 대한독립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청산리대첩 청산리 A는 B에서 일어났다 A edm:happenedAt B
청산리 간도 A는 B에 위치한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2. 이강훈, "청산리 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4.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5.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6. 이강훈, "청산리 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청산리전투",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이강훈, "청산리 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용한 정보

  1. "청산리 전투", 한민족 전투원형, 『문화콘텐츠닷컴』online, 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