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홍의장군 곽재우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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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25일 (월) 14: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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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의장군 곽재우 관련 기사()
파일:민족기록화 일러 관련기사.jpg
김현승 일러스트레이터
대표명칭 김태-홍의장군 곽재우 관련 기사



정의

민족기록화 김태-홍의장군 곽재우 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

내용

작품 속 곽재우

홍의장군 곽재우 : 전복의 복장이 사실과 다름. 이는 고구려벽화 신라의 토기유물, 조선시ㅐ드이 복식자료등을 미루어 볼 때 고쳐야 함. 곽재우는 전복이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의 철릭(帖裏)을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다고 한다.


Quote-left.png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을 입고서, 지금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Quote-right.png
출처: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온라인 참조: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1]






예복과 자결방식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
그러나 실제 그의 자결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는데, 당시 그의 최후를 목격했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민영환은 한복차림으로 사망했고, 장도(粧刀)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그의 사망 현장 목격자 중 한 명인 시종무관 어담(魚潭)은 그가 오른손에 손톱 깎기만한 작은 칼을 쥔 채로 사망하였고, 할복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었다고 회고하였고, 민영환의 장남 민장식의 아들인 민병진도 그의 조부가 단도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자결장소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2]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민영환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시종무관 어담(魚潭)김우현 목사, 민병진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의 집민영환의 어머니와 가족이 있었기에 자결 장소를 청지기였던 이완식의 집으로 택했으며, 그의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본저(本邸)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결한 당시 모습을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만 목격했다고 한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태-홍의장군 곽재우 관련 기사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온라인 참조: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단행본
  2.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