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무용이 스승 성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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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무용이 스승 성총에게
“몸을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요 마음 인도하신 분은 스승님과 도반입니다. 여러 해 가까이 모시는 동안 듣지 못한 것을 들려주셨으니 그 은혜가 바다보다 깊건마는 그 보답은 티끌보다 못합니다. 사람이 일흔까지 사는 것이 예로부터 드물다고 말을 하지만 느닷없이 광언(狂言)을 숨기셨으니 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요. 감히 석감(石龕)을 조성해 유골을 모셨습니다만 혼령이 어찌 여기에 오겠습니까. 역시 벌써 여기를 떠났을 텐데 오지도 떠나지도 않는 그것은 무슨 면목입니까?”
삶의 근원을 찾아 출가하다
무용수연(無用秀演, 1651~1719)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승을 떠올리며 천천히 글을 써내려갔다.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스승. 본래 오고감이 없으니 무엇을 기뻐하고 슬퍼할 일이 있을까만 자신의 내면에 꺼지지 않는 무진(無盡)의 등을 밝혀준 스승을 잊을 수는 없었다. 무용은 자신의 인생이 스승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을 만나기 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1651년 3월 전라도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산다는 일이 괴롭다는 것을 일찌감치 체득했다. 13살이 될 무렵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떠나보냈다. 그는 형의 보살핌 속에서 부지런히 학업을 닦아나갔다. 19살이 됐을 때는 유가경전과 제자백가의 문헌까지 모두 섭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생겨났고 죽으면 어찌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과거시험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고, 출세나 부귀영화는 부질없어 보였다. 답답함을 해결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집을 나섰다. 불교에서라도 해답을 꼭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극구 반대할 형에게는 아예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송광사였다. 그곳에서 출가한 무용은 오로지 참선에 매진했다. 하지만 은사로부터 받은 화두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점차 절망의 그늘도 짙어졌다. 그때 한 노장이 지나가며 던진 말이 화살처럼 그의 가슴에 꽂혔다.
“예부터 큰 도를 통달하고 마음 근원을 깨달은 이는 선과 교를 다 이행했다네. 선문(禪門)에만 밝은 것은 이치에 맞지 않네.”
지도나 나침반 하나 없이 어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겠느냐는 은근한 질책이었다. 무용은 교학을 익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바랑을 걸머지고 침굉현변(枕肱懸辯, 1616~1684)을 찾아갔다. 침굉은 선과 교에 두루 밝았으며 가축을 만나면 귀에다 염불을 해줄 정도로 자비로웠다. 훗날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들판에 버려 들짐승이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단호히 유언했던 고승이기도 했다.
성총을 만나 경장을 섭렵하다
무용은 침굉에게서 불경을 익혔다. 몇 해 뒤 무용은 침굉의 소개로 다시 조계산 은적사로 향했다. 그곳에 상주하는 성총이 무용의 안목을 틔워줄 수 있으리라는 노승의 깊은 배려였다.
성총은 침굉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강백이자 선승이었다. 선, 화엄, 천태, 정토 등 불교 전반에 이해가 깊었으며, 특히 화엄학의 대가로 유명했다.
1676년, 이들의 만남은 은적산에서 이뤄졌다. 성총은 무용을 보자마자 “이 사람은 옛 성현의 자리와 금강 선문[金仙]의 자리를 빼앗을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무용도 성총이 그토록 그리던 일생의 스승임을 직감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삶이 성총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후 무용은 무섭도록 경전 공부에 몰입했다. 막히는 곳이 있으면 성총에게 물었고, 성총은 곧바로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무용은 모든 경장을 섭렵할 수 있었다. 무용은 스승의 곁을 떠나 만행에 올랐다. 선암사, 송광사, 백운암 등에서 경전을 강의했으며, 화두참구에도 들었다.
난파선에 실려온 가흥대장경
그 무렵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1681년(숙종 7년) 6월로 접어들면서 태풍이 불어왔다. 그로인해 70여명의 어민이 목숨을 잃는 등 전국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던 며칠 뒤 전라도 신안 앞바다 임자도에 돌연 난파선이 표착했다. 그런데 배 안의 나무궤짝에는 불경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나무궤짝 속 불경이 조선불교의 판도를 바꿀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자도 앞바다에 홀연히 나타난 난파선. 대만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그 상선에는 명나라 말기부터 120여년에 걸쳐 간행된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 실려 있었다. 가흥대장경은 중국에서 간행된 역대 대장경 중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여기에 수록된 전적이 무려 2195부, 1만332권으로 중국불교의 결정체였다. 일본에 건너가 황벽종을 개창했던 중국 출신의 선승 은원(隱元, 1592~1673)의 뜻에 따라 제자들이 일본에서 가흥대장경을 간행하려 추진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태풍을 만나 대장경을 실은 배가 조선에 표류했던 것이다.
경전을 담은 궤짝들 중 일부는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많은 궤짝들이 바다 위를 떠다녔다. 영광 불갑사에 머무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총은 곧바로 표류선이 있는 임자도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수많은 경전들이 놓여있었고, ‘대명법수’ ‘회현기’ ‘금강기’ ‘기신기’ ‘정토기신문’ 등 국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귀한 책들도 많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성총은 부처님의 가피라 여기며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이 경전들을 모아 간행하겠다고 서원했다. 관아에서 수습해 조정에 올린 것 외에도 해변 곳곳에 떠내려 온 경전들도 대단히 많았다. 성총은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며 습득한 경전이 있는지 수소문했다. 행여 바다에서 건진 불서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곧바로 찾아가 그 책을 얻거나 필사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뒤에는 상당량의 불서를 모을 수 있었다. 1685년, 성총은 그 책들을 싣고 낙안(보성군 벌교읍) 징광사(澄光寺)로 향했다. 그곳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었던 침굉이 머무르던 사찰인데다가 종이 생산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불교의 판도를 바꾼 불서 편찬
징광사에 도착한 성총은 책의 판각 순서부터 정했다. 그리고 화엄보다 정토 전적부터 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잇따른 대기근과 전염병 창궐로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고 민심의 흉흉함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성총은 사람들이 정토신앙에 의지해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랐다. 또 송, 명, 청 등 중국의 지식인들도 열렬한 불교신봉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선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무용도 만행을 멈추고 성총의 불서 편찬을 적극 도왔다. ‘대명삼장법수’ ‘금강반야경간정기’ 등 판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는 스승이 불서간행으로 조선의 불교를 일신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성총은 무용 등의 적극적인 도움에 힘입어 15년 동안 197권 5000여판의 방대한 서적을 간행했다. 성총이 없었다면 조선후기 정토사상의 흥성과 화엄학의 중흥은 있을 수 없었으며, 불교가 서민들 속 깊숙이 스며들기도 쉽지 않았다. 또 성총이 승려교육의 정비를 자신의 시대적 과제로 삼았기에 선(禪), 교(敎), 율(律)이라는 조선후기 삼문수행(三門修行)의 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성총은 만년에 화엄과 정토의 보급에 더욱 힘썼다. 정토와 염불에 관한 내용을 변주하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7언 율시 100수에 담은 ‘정토찬(淨土讚)’을 간행했다. 더불어 광활한 화엄의 세계를 압축해놓은 ‘화엄현담회현기’를 펴냈다. 성총은 ‘화엄경소연의초’ 발간이 마무리되던 1700년 7월25일, 쌍계사 신흥암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가 열반에 들자 매일 밤 상서로운 빛이 감돌았으며, 7일째 밤 다비식 때 그 빛이 모여 남북으로 뻗쳤다고 전한다.
전할 수 없는 그리움
무용이 스승을 떠올리며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쓴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스승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을 선(禪)적으로 표현했다. 문도들은 무용에게 스승의 강석을 계승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수차례 사양하던 무용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법석을 열었다. 하지만 몇 해 뒤 “한갓 혀나 놀려대는 것이 어찌 염불에 전념하는 것만 하랴”며 자신의 길을 향해 홀로 떠나갔다. 그는 용문산 은봉암에 머물렀다. 때로는 각지를 돌며 시를 쓰고 인연 닿은 곳에 암자를 세우기도 했다. 종종 유생들과도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불교를 멋대로 재단해 폄훼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우물 안 개구리’라며 가차 없이 비판했다.
1719년, 69살의 무용은 영호남의 장로와 강사들이 거듭된 요청에 따라 화엄강회를 열었다. 그러고는 그해 10월17일 용문산 은봉암에서 아미타불을 염하며 왼발을 오른쪽 무릎에 얹고 마지막 숨을 거둬들였다.
선시의 달인 무용수연이 조선불교의 새로운 틀을 구축한 백암성총에게 쓴 글은 ‘무용당유고’에 수록돼 있다.
참고자료
- ‘정토보서’(백암성총 지음, 김종진 옮김, 동국대출판부)
- ‘무용당유고’(무용수연 지음, 이상현 옮김, 동국대출판부)
-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이종수, 불교학연구 21호)
- ‘백암성총의 불전 편찬과 사상적 경향’(조명제, 역사와 경계 제68집)
- ‘17세기 징광사의 불서출판’(이희재, 불교학보 제49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