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조가 신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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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가 신미에게
“순행(巡行) 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고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항상 부처님께 기도를 해주시고 사람을 보내어 자주 안부를 물어주시니 다만 황감할 뿐입니다. 행여 이로 인해 제가 멀리서 수행에 전념하고 계신 스님에게 폐를 끼치고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저의 지극한 정성에 부흥해 스스로 편안하게 머무르시기를 바라옵니다.”
세종이 아낀 학승
1464년(세조 10년) 여름, 신미(信眉, 1403?~1480?)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 상주하고 있었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돈다는 운수납자. 신미는 자신을 스승으로 여기며 의지하는 세조(世祖, 1417~1468)의 언해사업을 돕기 위해 한양에 수년 씩 머물렀다. 퇴락한 사찰의 복원을 위해 멀리 떠날 때도 적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환갑을 넘긴 신미에게 먼 길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복천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신미에게 복천사는 각별했다. 성군(聖君) 세종의 원찰이었기 때문이다. 세종도 초기에는 강력한 불교 탄압 정책을 폈다. 불교 종파수를 7개에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성 밖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시켰다. 허나 그것은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 국왕으로서의 역할이었음을 신미는 잘 알았다. 오히려 세종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퍽 호의적이었다. 초기부터 왕실불사를 지원하는가 하면 직접 사찰의 보수나 설립도 주도했다. 나중에는 무주고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거행하고 궁궐에 내원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세종도 신미에 대한 신뢰가 매우 두터웠다. 신미가 불경은 물론 사서삼경에 두루 밝으며 산스크리트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한 학승임을 알았다. 또 밤을 새워 예불을 드릴 정도로 신심이 지극하고,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장가로 불린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끼는 집현전 학자 출신의 수재 김수온의 친형이라는 점이 세종의 마음에 들었다.
불경 번역에 뜻을 함께 한 세종과 신미
세종은 산중에 머무르는 신미를 궁궐로 불렀다. 세종은 백성들이 누구나 글을 읽고 쓰기를 바랐고, 일반 백성에게 널리 퍼진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옮겨 배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이 사대부가 중심이 되는 성리학적 세계를 넘어 왕의 권위를 높일 수 있다고 여겼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첫 사업으로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내세우는 ‘용비어천가’와 불교 연원을 밝힌 ‘월인석보(月印釋譜)’를 편찬한 것도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의도에서였다.
신미로서도 불경 번역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다. 불교가 해동에 전래된 지 1000년이 넘었지만 백성들의 신앙은 미신과 기복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문을 익히지 못하면 불경을 읽는 일이 불가능했던 탓이다. 따라서 불경 언해는 불교를 신앙적인 측면뿐 아니라 사상적으로 민간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었다. 신미에게 번역은 백성들의 눈을 뜨이게 하는 일이자 강력한 불교 대중화운동이었다.
세종은 신미를 총애했고 자주 불러 얘기를 나누었다. 불교 관련 일이 있을 때면 신미와 반드시 상의하도록 명했다. 신미도 세종의 기대에 부응해 찬불가시(讚佛歌詩)를 지어 올리는가 하면, 1447년에는 석가모니 일대기를 한글로 엮으라는 세종의 명을 받은 수양대군을 도와 ‘석보상절(釋譜詳節)’ 24권의 간행을 주도하기도 했다.
세조의 업보를 이해한 신미
1450년, 세종이 승하한 뒤 신미는 주로 복천사에 머물며, 공부와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지 않아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를 이었다. 얼마 뒤에는 명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더니,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한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신미는 세조를 잘 알았다. 괄괄했지만 불심이 깊었다. 왕위에 오르기 오래 전부터 ‘불교가 유교보다 나은 것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던 그는 신미를 무척 존경했다. 세조는 세종이 직접 ‘석보상절’ 편찬을 부탁할 정도로 학문적인 기반과 안목도 탄탄했다. 이런 그가 처음부터 왕이 됐더라면, 아니 문종이 병약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골육상잔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사람들은 세조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피의 길을 걸었다고 했지만 신미는 세조가 국가를 위해 스스로 지옥을 짊어졌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더라도 수미산 같은 업보를 세조인들 피해갈 수 있을까. 신미는 그런 세조를 위해 기도하고 세조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힘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불보살님들과 백성들을 위한 길이라 여겼다.
세조 3년(1457년), 신미는 해인사 대장경 인출(印出)의 책임을 맡아달라는 세조의 부탁으로 해인사로 내려갔다. 이후 신미는 대장경 50부를 인출한 것을 비롯해 세조의 불경 조성과 국역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월인석보’와 ‘석보상절’을 합편하는 작업도 주도했다. 신미는 두 내용을 합치는 수준을 넘어 본문 내용의 정정과 보완, 주해의 대폭적인 추가 등 완벽성을 기했다. 또 1461년 6월, 불전 국역과 간행을 전담하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립된 뒤에는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능엄경언해’, ‘수심결’, 몽산화상 등 고승법어집을 직접 언해하거나 교정했다.
신미는 세종과 세조,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위해 촌음을 아껴가며 일에 매달렸다. 세조는 어느새 신미가 없는 불사를 생각할 수 없었다. 신미는 그런 세조 곁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언해하다가 ‘선종영가집’ 작업을 마친 1463년 11월에야 복천암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세조의 원찰, 오대산 상원사
세조는 자신의 형제들이 그랬듯 부스럼병이 심했다. 1463년 2월 세조는 온양 온천을 이유로 순행(巡幸)에 나서기도 했다. 세조가 신미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와 신미의 기도에 깊이 감사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도 신미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고 있음을 전했다.
세종의 원찰이 복천사였듯 세조도 자신의 원찰을 있기를 바랐다. 때마침 정희왕후가 세조의 치병 기도처를 부탁했고 신미는 오대산 상원사를 주목했다. 천하의 길지이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성지, 신미는 이곳이 세조를 위해 더 없이 좋은 도량임을 확신했다. 신미는 학조, 학열 등과 먼저 의발을 내놓고 적극 권선에 나섰다. 오래지 않아 여기저기서 동참의사를 알려왔다. 이 소식은 세조에게도 전해졌다. 감동한 세조는 불사를 돕고자 물자를 지원하라는 어명을 내리고, 직접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을 썼다. 여기에서 세조는 신미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을 드러냈다.
“…내가 왕이 되기 전부터 혜각존자를 알았다. 서로 도가 맞으니 마음이 화(和)하고 매번 티끌 길에 걸릴 때마다 나로 하여금 항상 깨끗한 생각을 가지게 했다. 이 모두 대사의 공이 아니겠는가. 여러 겁의 인연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 같을 수 있겠는가.…”
이때부터 오대산 중창불사가 본격화 됐고 불과 1년여 만에 불사가 회향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세조는 기뻤다. 1446년 3월 그는 상원사 중창 낙성에 맞춰 문무백관과 함께 다시 순행에 나섰다. 임금의 대대적인 행차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금강산에서는 부처님이 빛을 내고 보살이 나타나는 등 상서로운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세조는 과거까지 여는 등 민심대장정을 거쳐 상원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세조는 불당에 참배하고 밤새 신미와 담소를 나눴다.
백성의 말로 희망을 전한 학승
조선 최고의 숭불군주 세조는 1468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마지막까지 불경 언해 등 불사를 멈추지 않았다. 신미는 이런 세조를 위해 빈전(殯殿)에서 마지막 법석을 열었다. 신미는 허탈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신미는 예종과 성종대를 거치며 다시 거세지는 억불정책 속에서도 꾸준히 불사를 진행하다, 1480년 무렵 복천사에서 적멸에 들었다.
탁월한 지식과 언어능력, 그리고 고결한 인품을 바탕으로 기울어져 가는 불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던 신미. 그는 후세에 법어나 시, 글 한편 남기지 않고 적막한 역사의 뒤안길로 스스로 사라져갔다. 이 편지는 1970년대 처음 발견돼 단국대 이호영 교수에 의해 학계에 소개됐다.
참고자료
- ‘승 신미에 대하여’(이호영, 단국대 논문집 제10집)
- ‘속리산 복천암과 신미대사’(민덕식, 충북사학 제21집)
- ‘혜각존자 신미의 가계와 생애’(민덕식, 충북사학 제24집)
- ‘한글 창제의 배경과 불교와의 관계’(강신항, 불교문화연구 제3집)
- ‘세종의 불교신앙과 훈민정음 창제’(김종명, 동양정치사상사 제6권 1호)
-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의 역할’(이재형, 불교문화연구 제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