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혜심이 최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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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자 혜심이 최우에게

“세상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요, 사람의 목숨은 덧없는 것입니다. 들이쉬는 숨이 있더라도 내쉬는 숨은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꿈과 허깨비와 허공의 꽃과 같은데 애써 그것을 붙잡으려 괴로워하는가. 얻고 잃음을 모두 놓아버려라’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 그때그때 생각하고 깨달아, 번뇌, 망상, 집착을 없애면 그것은 더울 때 마시는 청량산(淸涼散)이 될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편지로써 공(公)이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확인할 것이니 부디 노력하십시오. 어떤 책에 이르기를 ‘나를 좋다 하는 이는 내 도적이요, 나를 밉다하는 이는 내 스승이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수선사에 있는 사람의 정 때문에 주제넘게 말했습니다. 허물하지는 마십시오.”

수선사에서 비롯된 인연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혜심(慧諶, 1178-1234)은 영락없는 산승(山僧)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권력자를 가까이 해도 권력 자체를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崔瑀, ?-1249)도 마찬가지였다. 수선사 사주(社主)인 자신이 정치와 밀착되면 세속에서 벗어나 부지런히 선을 닦아 부처를 이루자는 정혜결사 취지가 퇴색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당시는 무인들의 세상이었다. 60년 최씨 무신정권의 기틀을 세운 최충헌의 권력 승계를 꿈꾸던 최우도 일찌감치 선종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교종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이유가 컸지만 한 번의 깨달음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의 종지도 마음에 들었다. 출신성분이 한미한 권력자로서 갖게 되는 은근한 열등감을 선은 말끔히 씻어주었다. 최우는 틈틈이 선종 사찰들을 찾아다녔으며, 뛰어난 선승들을 만나 대화도 나눴다. 그 가운데 최우의 마음을 사로잡은 도량은 단연 수선사였다.

수십 년간 지속된 혜심과 최우의 인연도 수선사에서 시작됐다. 1207년, 조계산 수선사에 새로운 결사도량이 완성됐을 때였다. 붓글씨로 명성이 자자하던 최우가 왕희지체를 집자해 ‘수선사중창기’를 완성하면서 혜심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혜심은 산문에 든지 오래지 않았지만 주머니 안 송곳처럼 도드라졌다. 그의 치열한 수행은 다른 구참 수행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그의 안목은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걸림이 없었다. 혜심이 시를 빼어나게 잘 쓴다는 점도 최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눌의 제자로 인가를 받은 혜심

전라도 화순현의 최씨 집안에서 태어난 혜심이 출가한 것은 25살 때인 신종 5년(1202)이었다. 24살 때 사마시에 합격한 그가 어머니 재(齋)를 지내기 위해 인근 수선사를 찾았을 때였다. 그곳에서 만난 지눌은 진흙탕으로 전락한 불교계에서 연꽃처럼 청초한 수행자들의 결사모임을 이끄는 선승이었다. 그는 지눌에게서 자신이 평생 가도 좋을 길을 발견했다. 어머니 49재가 끝나갈 무렵 그는 지눌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고, 지눌도 선뜻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혜심은 전국을 두루 만행하며 무섭도록 정진했다. 그가 오산(蜈山)의 한 반석에 앉아 밤낮으로 선정을 익힐 때였다. 매일 오경(새벽 3~5시) 혜심이 큰 소리로 게송을 읊으면 그 소리가 10리까지 퍼졌다. 사람들은 그 게송소리에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았다. 지리산 금대암 너럭바위 위에서 수행할 때는 눈이 쌓여 이마를 덮고 오뚝이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겨울 고목과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의아해하며 몸을 흔들어볼 정도였다.

출가시기에 앞뒤가 있어도 깨달음에는 선후가 있을 수 없다. 혜심은 늦깎이 출가자였지만 누구보다 앞서갔다. 혜심은 스승 지눌로부터 3차에 걸쳐 인가를 받았다. 이때 지눌은 “내가 그대를 제자로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라고 밝혔다.

혜심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실행한 최우

1210년 조계산의 성자 지눌이 적멸로 돌아갔을 때 혜심은 수선사 2세 사주를 맡았다. 그것은 스승의 뜻인 동시에 결사 대중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가 사주가 됐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를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수선사로 속속 이어졌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던 최우도 그 중의 하나였다. 혜심을 만난 최우는 놀라웠다. 혜심은 무엇에도 걸림 없었으며, 그가 말하는 선의 세계에는 어떤 관념이나 분별도 붙을 수 없을 정도로 명료했다.

최우는 혜심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며, 혜심을 개경으로 불러들이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혜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산중에서 선정을 닦는다는 정혜결사의 이념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우는 만종(萬宗)과 만전(萬全) 두 아들을 수선사로 보내 혜심의 제자가 되도록 했다. 또 차, 향, 약은 물론 법복도 챙겨 보냈으며, 선종의 최고 승계(僧階)인 대선사(大禪師)까지 수여했다. 하지만 정작 혜심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1215년 지눌의 유고인 ‘원돈성불론’ 1권과 ‘간화결의론’ 1권을 간행할 때도 혜심은 발문에 ‘대선사’라는 승계를 빼고 그저 스스로 칭하던 ‘무의자(無衣子)’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최우는 그런 혜심을 더욱 공경했다. 그는 직접 참선수행을 했고, 의문이 들 때면 서신으로 물었다. 이 같은 혜심과의 관계는 최우가 최충헌의 권력을 계승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만일 스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확탕·노탄지옥에 빠져 벗어날 기약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를 당해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헛된 욕심이 크게 줄었으니 뼈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수어도 그 은혜를 갚지 못할 것입니다.”

혜심은 최우의 편지가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음을 잘 알았다. 그는 부친 최충헌과는 사뭇 달라보였다. 선대에 강제로 빼앗은 땅을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새로운 문인들을 대폭 기용함으로써 인심도 크게 얻었다. 선종 사찰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면서 불편한 관계에 있던 화엄종과 법상종에 대해서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간화선으로 최우를 이끈 혜심

혜심은 최우가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간화선이 최우를 탐욕과 집착, 분별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혜심은 답장에서 최우에게 세간과 출세간, 더러움과 깨끗함, 선과 악에 대해 취하고 버리거나 사랑하고 미워함이 없으면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이를 멀리하고, 싫은 소리를 자주 하는 이를 가까이 할 것도 당부했다. 혜심이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를 향해 ‘앞으로 얼마나 노력하는지 점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화두가 그를 구제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혜심은 간화선 정착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간화선 수행의 병통과 치유법을 제시했으며, 역대 조사들의 문답과 기연을 시적으로 풀어낸 해동 최고의 선서(禪書) ‘선문염송(禪門捻頌)’ 30권도 편찬했다. 혜심은 이전 선사들과 달리 비구니들에게도 큰 관심을 보였다. 화두를 주고 꼼꼼히 지도하는 것은 물론 안거에도 참여케 하는 등 깨달음으로 적극 이끌었다.

1234년 6월26일 깊은 병에 든 혜심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과 선문답을 주고받은 뒤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구나”라며 살며시 미소를 지은 뒤 열반에 들었다. 세수 57세, 법랍 33세, 조사로서의 본분을 남김없이 펼쳐 보였던 산승의 마지막 진면목이었다.

정신적 지주를 잃고 헝클어진 최우

혜심의 부재는 최우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당시 최우는 이미 권력과 시대에 매몰돼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음모와 암투가 끊이질 않았다. 최우는 자리보전을 위해 정적은 물론 애꿎은 사람들의 목숨까지 가차 없이 빼앗았다. 그 업장은 곧 크고 작은 과보들로 이어졌고, 최우의 번민과 괴로움도 갈수록 커져갔다. 그의 초발심은 옅어져갔고,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만고의 진리에도 등을 돌렸다.

1231년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성장한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시작된 길고 지리한 40년 전쟁도 최우를 막다른 길로 내몰았다. 1232년 몽골과의 전쟁을 결심한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그는 백성의 생명보다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우선했다. 전쟁으로 수십만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부인사 초조대장경, 황룡사 구층목탑 등 문화재도 소실되고 말았다.

그는 선원사를 창건하고 팔만대장경을 조성했지만 사치와 전횡을 그치지는 않았다. 촌부나 아이들까지 칭송했다는 초기의 최우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장장 30년 동안 최고 권력 자리를 지켰던 최우는 고종 36년(1249)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 그는 혜심이 좌우명으로 삼으라고 했던 ‘(모든 것이) 항상 꿈과 허깨비와 허공의 꽃과 같은데 애써 그것을 붙잡으려 괴로워하는가. 얻고 잃음을 모두 놓아버려라’는 말을 아프게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혜심이 최우에게 보낸 편지는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에 수록돼 있다.

참고자료

  • ‘진각국사어록’(김달진 역주, 세계사)
  • ‘진각국사어록 역해1’(김영욱, 가산불교문화연구원)
  • ‘진각혜심, 수선사, 최씨무인정권’(최병헌, 보조사상 7집)
  • ‘진각국사 혜심의 수선사활동’(진성규, 중앙사론 5집)
  •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최은희,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7집)
  • ‘고려 진각국사 혜심의 여성성불론’(김영미, 이화사학연구 30집)
  • ‘최우의 사원정책과 수선사 혜심’(조은순, 경희대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