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후-여진정벌
김지선
여진정벌 | |
작가 | 안재후 |
---|---|
제작연도 | 1975년 |
규격 | 300호(290.9x197cm) |
유형 | 전쟁 |
분류 | 유화 |
소장처 | 전쟁기념관 |
개요
내용
1107년(예종2)에 윤관(尹瓘) 장군의 여진정벌을 담은 기록화[1]로, 윤관의 지휘하에 고려군이 동북계의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성곽을 쌓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전쟁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민족기록화들은 아군과 적군을 선 대 악, 승리 대 패배라는 고정된 틀에 따라 관계를 설정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며, 죽음에 대해서도 굴욕적이고 무의미한 적군 병사들의 죽음과 숭고하고 영웅적인 아군 병사와 지도자의 죽음의 대비로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화면의 전경을 비참하게 살해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진 여진족의 시체와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체념으로 채우고 이를 전투로 인해 불타오른 민가와 피폐해진 황량한 들판, 핏빛의 저녁노을과 대비시킴으로써 전쟁의 승리보다는 공포와 비참함, 비인간적인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관람자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모녀의 절망적인 표정과 죽은 아이를 껴안고 젖을 물리려는 듯 한 쪽 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처절한 몸짓은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섬의 학살>을 떠올리게 한다.[2]
- 들라크루아-키오스섬의 학살.JPG
들라크루아作 '키오스섬의 학살'
윤관은 패배의 원인이 기병(騎兵)의 열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국왕에게 건의하여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여 정예 군사를 양성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 1일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은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여 여진정벌에 나섰다. 그 결과 ‘그 지방이 300리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蓋馬山)에 닿았으며 남쪽은 장주(長州)·정주(定州)에 접한다’는 전과를 올렸다. 윤관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 등 9성을 쌓고 남쪽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면서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주변 지역이 매우 넓은 데다가, 완안부 세력이 산 속에 거주하면서 집요하게 약탈하며 9성의 반환을 애걸하였고, 여진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국력이 소모되었으며, 향후 거란과도 다툴 수 있다는 여론에 따라, 고려는 1년 7개월만에 이주한 백성을 본거지도 되돌려보내고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진정벌 [女眞征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57865&cid=46621&categoryId=46621
관련 민족기록화
고려시대 전쟁 소재 작품
추출정보
작품정보 연결망
네트워크 그래프가 보이지 않는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노드 | 관계 | 노드 |
---|---|---|
안재후-여진정벌 | ~에 의해 그려지다 | 안재후 |
안재후-여진정벌 | ~에 소장되어 있다 | 전쟁기념관 |
안재후-여진정벌 | ~을 소재로 삼다 | 윤관 |
안재후-여진정벌 | ~을 소재로 삼다 | 여진정벌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
안재후-여진정벌 | 제작연도 | 1975년 |
안재후-여진정벌 | 국회사무처 대여기간 | 1991.01.08 ~ 1992.01.07 |
안재후-여진정벌 | 전쟁기념관 이전 연도 | 1998년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안재후-여진정벌 | 소장처 | 국회사무처 | 37.532103 | 126.914133 |
안재후-여진정벌 | 소장처 | 전쟁기념관 | 37.5369559 | 126.9749353 |
참고문헌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
주석
- ↑ "기록화 : 여진정벌",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온라인 서비스(2017년 2월 4일 확인)
-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