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평양전투
제4차 평양성 전투
제4차 전투가 1592년 12월에 있었다.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다음 해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칠성문(七星門)·보통문·함구문(含毬門) 등 세 성문 밖에 진을 쳤다.
이에 조선의 이일(李鎰)·김응서의 군대와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전군에 명을 내려 평양성의 서북면을 포위하게 하였다. 이어서 오유충(吳唯忠)·사대수(査大受)와 승군은 모란봉(牡丹峰), 양원(楊元)·장세작(張世爵)은 칠성문, 이여백(李如柏)·이방춘(李芳春)은 보통문, 조승훈·낙상지(駱尙志)는 이일·김응서와 함께 함구문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독 이여송은 기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를 지휘하며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베고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銀) 50냥을 준다며 사기를 북돋웠다. 이에 일본 장수 고니시는 연광정(練光亭)의 토굴로 도망가고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의 제장들도 여기에 모여서 응전하였다.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이 죽을힘을 다할 것을 염려, 성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에게 성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하였다. 고니시는 군량과 무기가 바닥나고 원군도 오지 않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 진영에 통보하자 조선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고니시는 남은 군사를 거두어 중화·황주(黃州)를 거쳐 다음 날 봉산(鳳山)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 둔진했던 일본군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하고 조선은 비로소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 평양성 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