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김종서(金宗瑞) | |
대표명칭 | 김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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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金宗瑞 |
생몰년 | 1383년(우왕 9)-1453년(단종 1) |
본관 | 순천(順天) |
시호 | 충익(忠翼) |
호 | 절재(節齋) |
자 | 국경(國卿) |
시대 | 조선 |
성격 | 문신 |
목차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내용
관직생활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고,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상황을 조사하였고, 같은해 10월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었고,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상황을 조사, 보고하였고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황해도 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인 그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1]
6진개척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동안 맡았다. 또한 여진족들의 정세를 탐지·보고하고, 그에 대한 대비로 비변책을 지어 건의하였다.[2]
고려사 편찬
1445년(세종 27)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 지방에서 목마장이 적합한 곳과 방마(放馬)가 가능한 곳의 수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좌찬성겸춘추관지사로서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 책임을 맡아 진두지휘하였다. 또한 같은 해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 책임관으로도 임명되었다.[3]
계유정란
1452년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으로 황보인(皇甫仁)ㆍ정분(鄭笨)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했다. 문종의 유명(遺命)으로 단종을 협찬하던 재상 가운데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붙은 지용(智勇) 겸비한 명신으로서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世祖))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격살(擊殺),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로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제1차 희생자가 되었다.[4]
그 뒤 1678년(숙종 4)에 그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려사 | 김종서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고려사절요 | 김종서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세종실록 | 김종서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김종서 | 육진 개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종서 | 이징옥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세조 | 계유정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계유정난 | 김종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김종서 | 조선 세조 |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영상
- NATV 국회방송 - 북방을 개척한 큰호랑이, 김종서(2015년 4월 5일)
주석
- ↑ "김종서",
『국어국문학자료사전』online , 한국사전연구사. - ↑ "김종서",
『두피디아』online , 두산백과. - ↑ 이해준, "김종서",
『디지털공주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종서",
『인명사전』online , 민중서관. - ↑ 최승희, "김종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