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영암
식영암(息影庵) | |
대표명칭 | 식영암 |
---|---|
한자 | 息影庵 |
호 | 식영암(息影庵) |
성씨 | 양씨(梁氏) |
본관 | 남원(南原) |
정의
고려 후기의 승려
내용
속성은 양씨(梁氏)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인데, 속명은 알 수가 없다. 법명은 연감(淵鑑)이고, 식영암(息影庵)은 그의 호이다. 식영암을 혹 식영감((息影鑑)으로 표기한 예가 있는데, 이는 승려의 경우 법명(法名)의 뒷글자만 지칭하여 선탄(禪坦)을 탄사(坦師)라 약칭한 것과 같이, 연감(淵鑑)의 감(鑑)자를 호인 식영(息影)에 붙여서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1]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민사평(閔思平, 1292∼1359), 이암(李嵓, 1297∼1364) 등과 교유하였다. 이제현과는 동년배 혹은 연상으로서 유자(儒者)와 불자(佛者)간의 사귐이 막역(莫逆)하였다. 민사평에게는 대화상(大和尙)으로서 가르침을 베푸는 입장에 있었으며, 이암과는 만년에 방외우(方外友 : 신분을 떠난 친구)로서 교유하였다. 특히 이암은 식영암이 강화도(江華島)의 선원사(禪源寺)에 있을 때 절 가운데 집을 지어 해운당(海雲堂)이라 편액(扁額)하고 조각배로 왕래하며 각별한 교유를 하였다. 선원사에 있을 때에는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脩, 1320∼1392)에게 능엄경(楞嚴經)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식영암은 강화도의 선원사와 용장사(龍藏寺), 전남 고흥 월남사(月南寺)의 장로(長老)와 주지(住持)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화상(大和尙)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2]
식영암의 문학
식영암은 고승(高僧)들이 지니고 다니는 지팡이 석장(錫杖)을 의인화(擬人化)한 가전(假傳) 「정시자전(丁侍者傳)」의 작자이다. 『동문선(東文選)』에 13편의 산문작품이 뽑힐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식영암집(息影庵集)』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현전하지 않는다.[3]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식영암 | 혼수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시각자료
주석
- ↑ 김건곤, "식영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건곤, "식영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건곤, "식영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강혜규, 「<정시자전>(丁侍者傳)의 주제의식: 식영암(息影菴)의 사물인식을 중심으로」, 『국문학연구』 19, 국문학회, 2009, 89-112쪽.
- 김건곤, 「釋 息影庵의 正體에 대한 再論 - 南原梁氏, 法名 淵鑑 : 釋 息影庵의 正體에 대한 再論」, 『대동한문학』25, 2006, 348-374쪽.
- 김건곤, "식영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종문, 「'息影菴 = 德興君'說에 對한 再檢討」, 『한문교육연구』19, 한국한문교육학회, 2002, 521-5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