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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현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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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샘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15일 (금) 17:4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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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현화사
(開城 玄化寺)
대표명칭 개성 현화사
한자 開城 玄化寺
주소 개성시
건립시기 1020년



정의

개성시에 있었던 절.

내용

고려 현종 11년(1020) 준공된 현화사는 현종(顯宗)이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세운 부모를 위한 원찰(願刹)이었다.

고려에서는 절 서북쪽에 진전(眞殿)을 설치하고 왕ㆍ왕비가 죽으면 그들의 진영(眞影) 즉 초상화를 진전(眞殿)에 걸어 때에 맞춰 제사를 지내었다. 진전(眞殿)이 설치된 절을 원찰(願刹)이라 했고, 선대 부모를 위한 또는 왕 자신을 위한 원찰(願刹)을 정하거나 새로 창건하는 것은 왕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무엇보다 원찰(願刹)은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불교에 유교적인 효(孝) 관념이 결합된 요소이기도 했다. 현화사 진전(眞殿) 안에는 현종(顯宗)의 부모인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 그리고 누이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 및 현종비 원정왕후(元貞王后)의 진영이 봉안되었고, 현종이 죽은 뒤에는 현종(顯宗)의 진영(眞影)도 함께 봉안되었다.

거란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017년(현종 8)에는 최사위(崔士威) 등을 시켜 부모의 새 원찰(願刹)인 현화사 개창공사를 시작했다.

현화사(玄化寺) 창건과정은 전적으로 현종의 적극적인 후원에 이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현종(顯宗)은 건물을 짓고 범종과 법고를 주조하는 등 절의 외관을 갖추는 한편으로 송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장경을 구해 오게 하여 현화사(玄化寺)에 봉안하였다. 그리고는 『대반야경』, 『화엄경』, 『묘법연화경』, 『금광명경』 등의 경전을 특별히 간행하여 현화사에 봉안케 하고 따로 반야경보(般若經寶)를 설치하여 대장경 간행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1020년에는 부모의 능에서 출현했다고 하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수습하여 현화사에 7층 석탑을 세우고 탑 1층에 사리를 봉안했다. 즉위 초부터 거란의 침입에 시달리다 10여 년만에 안정을 찾은 현종으로서는 국가의 안위와 융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매년 4월 8일(석탄일)부터 3일 밤낮 동안 현화사에서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개설하여 국가의 융성과 안위를 기원했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며 생사의 고비를 오락가락하며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를 그리워하던 효심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매년 7월 15일(백중)부터 3일 밤낮 동안 미타불회(彌陀佛會)를 개설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현화사(玄化寺)는 고려왕실의 대표적 원찰(願刹)이었지만 절이 폐사된 이후 절터에 남아 있던 당간지주, 석비, 7층석탑, 석등은 근대에 들어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당간지주, 석비, 7층석탑은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석등은 1915년 일제가 원래 자리에서 경복궁 뜰로 옮긴 이후 오늘날까지도 경복궁 뜰 한쪽에 서 있다. [1]

현화사와 관련된 문화재


      • 고려사절요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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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현화사비", 금석문연구,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