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중
손화중(孫華仲) | |
대표명칭 | 손화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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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孫華仲 |
생몰년 | 1861년(철종 12)-1895년(고종 33) |
본관 | 밀양(密陽) |
호 | 초산(楚山) |
자 | 화중(華仲) |
시대 | 근대 |
유형 | 농민운동가 |
목차
정의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내용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접주로서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1]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全州和約)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羅州)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 운동을 지도하였다. 제2차 동학혁명운동을 일으킨 1894년 10월에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하여 최경선(崔景善)과 함께 나주 부근에 주둔하여 일본군을 경계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의 공주(公州) 공략이 실패한 뒤에는 나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지형관계로 또 실패하였다.[2]
12월에 일시 광주(光州)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정부군의 압박을 받고 그 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興德)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이모씨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다가,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고 말았다. 전주 감영(監營)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되었고,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 김덕명(金德明), 최경선, 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처형되었다.[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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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 교조신원운동 | A는 B에 참가하였다 | |
손화중 | 보은집회 | A는 B에 참가하였다 | |
손화중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가하였다 | |
전봉준 | 손화중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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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 손화중은 교조신원운동에 참가하였다 |
1893년 | 손화중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 |
1894년 | 손화중은 1차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
1894년 | 손화중은 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
1895년 | 손화중은 처형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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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20230 | 126.806633 | 손화중은 백산성에서 봉기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동학농민혁명(게시일: 2014년 2월 9일)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