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년

Encyves Wiki
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1일 (금) 22:10 판 (새 문서: {{인물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이조년 |한자표기=李兆年 |영문명칭= |본관=성주(星州) |이칭= |시호=문열(文烈) |호=매운당(梅雲堂),...)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조년(李兆年)
대표명칭 이조년
한자표기 李兆年
생몰년 1269년(원종 10)-1343년(충혜왕 복위 4)
본관 성주(星州)
시호 문열(文烈)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원로(元老)
시대 고려
이장경(李長庚)



정의

고려 말의 문신.

내용

이조년(李兆年)의 증조할아버지는 이돈문(李敦文)이며, 할아버지는 이득희(李得禧)이고,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 향리 이장경(李長庚)으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인은 경산부사 정윤의(鄭允宜)이다. 아들로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를 두었고, 손자로는 이포의 아들인 이인복(李仁復)·이인임(李仁任)·이인미(李仁美)·이인립(李仁立)·이인달(李仁達)·이인민(李仁敏)이 있다.[1]

이조년(李兆年)은 1294년(충렬왕 20) 향공진사(鄕貢進士)로 급제한 후 안남도호부의 서기(書記)를 지냈다. 이후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1306년(충렬왕 32)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의 이간으로 충렬왕·충선왕 부자간 다툼이 치열하였는데 이조년은 진퇴(進退)를 삼가하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 후 13년간은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가 왕위를 넘보자 발분(發憤)하여 홀로 원나라에 가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충숙왕이 환국한 후 감찰장령(監察掌令)·군부판서(軍簿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에서 숙위(宿衛)하면서 방탕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경계의 말을 간곡히 올리자 왕이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다고 한다. 충혜왕이 왕위에 오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임명하였다. 충혜왕의 방탕을 보고 충정으로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2]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위은숙, "이조년", 『디지털고령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상열, "이조년", 『디지털구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