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순종
조선 순종(朝鮮 純宗) | |
대표명칭 | 조선 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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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朝鮮 純宗 |
생몰년 | 1874-1926 |
이칭 | 이척(李坧), 융희황제(隆熙皇帝),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 |
호 | 정헌(正軒), |
자 | 군방(君邦), |
출생지 | 창덕궁 관물헌(觀物軒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왕 |
부 | 고종 |
모 | 명성왕후 |
전임자 | 고종 |
정의
순종(純宗, 1874~1926)은 조선의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이다.
내용
출생과 성장과정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며, 호는 정헌(正軒)이다. 순종은 둘째로 태어났지만 출생 당시 왕과 왕비 사이에는 생존한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원자로 불렸다. 이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11년만의 경사였다. 순종이 태어난 지 1년째인 1875년(고종 12) 2월 18일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에서 순종의 세자 책봉의식이 거행되었다. 9세가 되던 1882년(고종 19) 1월 10일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15일에는 관례를 치루었다. 관례를 치룸과 동시에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으며 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의 딸을 2월 19일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민태호의 딸이 바로 훗날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이다.[1]
을미사변과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
- 을미사변과 명성황후의 죽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따라 정변이 계속되며 순종의 처지 역시 순탄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 순종 개인의 인생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것은 22세에 닥친 어머니 시해, 을미사변이었다. 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왕후 민씨를 폐서인(廢庶人)으로 한다는 조령을 내지자 왕태자였던 순종은 상소문을 올려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였고, 이에 고종은 곧바로 왕태자의 정성과 효성을 생각하여 폐서인시킨 왕후에게 빈(嬪)의 칭호를 내렸다.[2]
- 대한제국 선포와 순명효황후의 죽음
이후 친일적인 인사들이 내각에 기용되는 가운데 갑오개혁(甲午改革)이 계속 진행되었고, 이를 타계하기 위하여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에 따라 순종 역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년 후인 1897년 고종이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으로 환어하여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순종은 황태자로, 세자빈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렇지만 황태자비는 1904년(광무 8) 11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2년 후인 1906년(광무 10)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태자비로 정하고, 이듬해 초 황태자비로 책봉하였으니, 바로 훗날의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이다.[3]
대한제국 제 2대 황제로 즉위
한편 후비를 맞아들인 이 해 순종은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는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순종 개인적으로도 어머니의 죽음과 부인의 사별에 이은 또 하나의 불행이었다. 즉위의 과정이 순리에 따른 것이 아닌 일제의 강제력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4]
- 헤이그 특사 사건과 순종의 대리청정
고종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벌인 헤이그 특사 사건을 벌였지만 각국의 정부에서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외교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일제는 이를 조약위반으로 규정하고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였으며, 고종은 어쩔 수없이 황위를 순종에게 대리하라는 명을 내렸고 1907년 7월 19일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하였으며, 다음 날 순종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외국 영사를 접견하며 대내외적으로도 순종의 대리청정은 기정사실화 되었다.[5]
- 가속되는 일제의 침탈
순종의 대리청정의 기간 동안 일제의 국권 침탈은 갈수록 심해졌다. 1907년 7월 24일 소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통감이 조선의 국정 전반을 간섭할 수 있게 됨은 물론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재정부족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6]
- 순종의 즉위
순종은 1907년 8월 27일 순종은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치루었으며, 호는 융희(隆熙)로 정하였다. 서양식 건물이었던 돈덕전에서 거행된 순종황제의 즉위식은 과거 조선의 국왕들은 물론 고종의 황제즉위식이 백관이 조복(朝服)을 입고 진행했던 데에 반하여 서구식 대례복이나 후록코트를 입고 진행되었다고 한다. 또 황제즉위식이 결정되고 난 8월 7일에는 귀비 엄씨(貴妃 嚴氏)의 아들로 순종에게는 이복동생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황태자로 책봉하기로 하고, 한 달 후인 9월 7일 이를 선포하여 만방에 알렸다.[7]
일본에 의한 영토 순행
일제는 내외적으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을 모두 탈취하였으며, 이에 따라 순종은 이름뿐인 황제로 전락하였다. 그렇지만 순종은 여전히 대한제국의 황제라는 상징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로, 일제는 이를 자신들의 침략과 통치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기획된 것이 순종황제의 순행(巡幸)이다.[8]
- 순행의 목적
물론 과거 조선의 군주들 역시 궁 밖으로 행차를 하긴 했다. 그렇지만 과거 국왕의 행차는 도성 주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의 원행(園行)이나 능행(陵幸)이었던 반면 순종의 순행은 국토의 남단인 영남지방과 북단인 서북지방이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9] 토오 히로부미를 필두로 한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조중응(趙重應) 등 친일인사들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증가한 의병 투쟁을 억제하기 위해 순행을 기획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던 의병의 활동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대한제국 황제가 일제의 보호 하에 건재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주어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것이었다.[10]
- 두 차례의 순행
이에 1월 초와 말 두 차례의 지방순행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순행은 이토오 히로부미가 동행하며 순종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즉 순종과 나란히 서있는 이토오의 모습을 연출하여 한일우호의 모습을 지방민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순종은 가는 곳마다 지방의 관민을 만나고, 그 지역의 이름난 선배와 관리들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주는 한편 이토오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한일의 우호 증진과 일본이 한국의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힘을 쓰고 있다는 연설을 하며 지방민의 인심을 우호적으로 돌리려 했다.[11]
의의
왕실에서 태어나 세자, 황태자를 거쳐 황제에 올랐지만 순종(純宗)이 생존했을 당시는 개항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어지러운 시기로, 그 과정에서 순종은 어머니를 잃고, 부인 역시 잃었으며, 자의가 아닌 일본의 강제로 황위에 올라 황제로서 자국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장 비극적인 국왕이었다. 순종이 자신의 감상이나 생각 혹은 정치적 구상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기록은 매우 적다. 다만 대내외적인 혼란 속에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건강하지 못했다고 한다.[12]- ↑ 정상우"순종(조선)",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정상우"순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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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