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9일 (화) 10:20 판
충감(沖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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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충감 |
한자 |
沖鑑 |
생몰년 |
1274년(원종 15)-1338년(충숙왕 복위 7) |
시호 |
원명(圓明) |
호 |
설봉(雪峰) |
휘 |
충감(冲鑑) |
탑호 |
원소(圓炤) |
자 |
절조(絶照) |
승탑비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충감의 성은 김씨(金氏), 호는 설봉(雪峰), 자는 절조(絶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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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는 휘(諱)는 충감(沖鑑)이요, 자(字)는 절조(絶照)이며, 호는 설봉(雪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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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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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7세 때 부모의 명을 받고 선원사(禪源寺)에 출가하여 자오국사(慈悟國師)의 제자가 되었다. 1292년(충렬왕 18)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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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이미 소식(素食)하였으며, 뭇 아이들과 유희를 하는데도 포백으로 가사(袈裟)를 만들어 불사(佛事)의 놀이를 하였고, 점차 자라서는 부모에게 명을 받고 선원사(禪源寺)에서 머리를 깎고는 자오국사(慈悟國師)에게 예를 드리고 스승으로 삼았다. 나이 19세에 승과(僧科)를 보아 상상과(上上科)에 올랐으나 어느 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비록 다시 저 시방(十方)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교리(淸靜敎理)를 항하사(恒河沙)같이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다만 스스로 노고만을 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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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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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유학
명예나 문자를 탐구하는 것보다는 도를 닦아 얻는 과보를 중시하여 각지를 다니면서 도를 구하다가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도행(道行)이 높은 철산(鐵山)의 경선사(瓊禪師)를 만난 뒤 함께 귀국하여 3년 동안 제자의 예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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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비록 시방세계 부처님들의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많은 청정한 가르침을 모두 익힌다고 하여도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을 늘릴 뿐으로 어찌 무루과(無漏果 : 번뇌가 없는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를 닦음만 하겠는가’라 하고서 지금까지 공부하던 것을 버리고 곧바로 옷을 떨쳐 일어나 여러 지방으로 (깨달음을 구하여) 돌아다녔다. (중국의) 오초(吳楚 : 강남지방) 지역에 머물 때에 철산(鐵山) 소경(紹瓊) 선사의 도행이 대단히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서, 3년간 모시니 소경선사도 크게 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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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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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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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선사가 중국으로 돌아감에 미쳐 스님은 용천사(龍泉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백장(百丈) 회해(懷海) 선사가 제정한 『선문청규(禪門淸規)』를 가지고 실행하였다. 그후 선원사에서 15년간 주지하면서 선문의 종지를 드날려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보광사로 온 것은 두 번째 사용된 지원(至元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335~1340년까지 사용) 2년(충숙왕 복위5, 133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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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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