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천희

Encyves Wiki
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0일 (일) 22:32 판 (구법유학)

이동: 둘러보기, 검색
천희(千熙)
BHST Monk1.png
대표명칭 천희
영문명칭 Cheonhui
한자 千熙
생몰년 1307(충렬왕 33)-1382(우왕 8)
시호 진각(普照)
설산(雪山)
천희(千熙)
탑호 대각원조(大覺圓照)
출신지 흥해(興海)
승탑비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Quote-left.png

스님의 휘는 천희(千熙)요 호는 설산(雪山)이며 흥해(興海) 출신이다. (결락) 구(具) 전리판서(典理判書) 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니, 최씨가 꿈에 큰 배를 보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고, 그 물이 대문(大門) 앞에까지 이르러 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였다. 만삭이 됨에 또 백학(白鶴)이 그의 복부를 쪼아 청첩가사(靑帖袈裟)를 입은 한 스님이 뛰어나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 후 대덕(大德) 정미년(丁未年) 5월 21일 탄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출가수행

Quote-left.png

스님의 나이 13살 때 화엄종(華嚴宗) 반룡사(盤龍社) 주지인 일비대사(一非大師)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沙彌)스님이 되었다.

Quote-right.png
출처:


구법유학

Quote-left.png

갑진년(甲辰年) 가을 우리 스님께서 배를 타고 중국 항주(杭州)에 이르렀다. 내가 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규보(跬步)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그리하여 스님께서 휴휴암(休休菴)에 이르렀다. 그 날 밤 몽산(蒙山)의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 곧 영각(影閣)에 방광(放光)함이 있었다. (결락) 인(人). 의발심이지(衣鉢心異之). 스님을 모시고 방장실(方丈室) 앞에 다다르니, 문에 자물쇠가 매우 견고(堅固)하게 잠겨져 있었다. 삼전어(三轉語)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스님께서 그 글을 읽고 설명하니 자물쇠에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이를 본 대중(大衆)은 모두 숙연(肅然)하였다. 실중(室中)에 궤(樻)가 있는데, 사(師) (결락) 그 속에 주봉(柱棒)과 불자(拂子)가 있었다. 그것을 들어 나에게 주려고 하니 이를 본 대중들은 더욱 탄복하였다. 또 칠(漆)을 한 자그마한 궤가 있었는데, 이는 잠겨져 있지 않고 다만 상면(上面)에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여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벌을 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절성(浙省)승상(丞相) 장대위(張大尉)의 제(弟) (결락) “그 속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습니까” 하였으므로 스님이 이르기를 “문서(文書)입니다”라 하였다. 또 묻기를 “지금 그것을 열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스님이 이르기를 “열어 볼 수 있습니다” 하고, 곧 열어보니 과연 2질(秩)의 문서가 있었다. 그 중 (결락) 하나에는 군도(群盜)가 삼보(三寶)를 파괴하여 마침내 절이 멸망(滅亡)할 것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본 승상(丞相)이 노(怒) (결락) “해외에서 온 사람을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나는 우리 불법(佛法)을 부지런히 배울 뿐이라” 하고, 받았던 몽산(蒙山)의 의물(衣物)을 그냥 두고 떠나갔다.

Quote-right.png
출처:



Quote-left.png

병오년(丙午年) 봄 만봉(萬峯)을 성안사(聖安寺)로 찾아 갔으나, 만봉은 3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만봉(萬峯)이 이르기를 “고려노화상(高麗老和尙)이 (결락) 입시(入時)가 없거늘 어찌 출시(出時)가 있겠습니까” 하니, 만봉(萬峯)이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으나, 누가 친절한 마음으로 나의 병을 간호(看護)해 주겠는가” 하였다. 스님께서 주먹으로 그의 등을 안마해 주었다. 그 날 밤 삼경(三更)에 만봉이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주면서 이르기를 불문(不聞) (결락) 성안사(聖安寺)를 떠나 오강(吳江)에 이르니, 어떤 스님이 그곳에 머물기를 청(請)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떠났다. 만봉회상(萬峯會上)의 어느 스님이 만봉이 삼경(三更)에 스님에게 전해준 의(衣)·봉(棒)을 빼앗고자 이날 밤에 오강(吳江)까지는 따라왔으나, 승방(僧房)에는 미치지 못하고 되돌아갔으니, 그 스님의 속성(俗姓)은 마씨(馬氏)였다. 우는 소리를 듣고 (결락) 건너간 것이 분명하다. 오호라! 몽산(蒙山)이 휴휴암(休休庵)에서 방광(放光)하여 앞의 일을 현몽(現夢)으로 보여준 것이고, 만봉(萬峯)이 삼경(三更)에 전법(傳法)한 것은 후일(後日)을 경계한 것이다. 미래(未來)의 일을 훤히 내다보시고 묘(妙)하게 유촉(遺囑)하였으니, 스승과 제자간의 도(道)는 시간적인 고금(古今)과 공간적인 하이(遐邇)에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석씨지(釋氏之) (결락)

Quote-right.png
출처:


(귀국 및) 활동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 김상현, 「眞覺國師 千熙의 佛敎史的 位相」,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57-66쪽.
  • 최연식, 「眞覺國師 千熙의 生涯와 思想」,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67-90쪽.
  • 엄기표, 「水原 彰聖寺의 沿革과 眞覺國師 千熙의 史蹟」, 『문화사학』 39, 문화사학회, 91-116쪽.
  • 박상국, 천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수원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488-505쪽.
  •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