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
조경(趙儆) | |
대표명칭 | 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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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趙儆 |
생몰년 | 1541년-1609년 |
본관 | 풍양(豊壤) |
이칭 | 사척(士惕) |
시대 | 조선 |
국적 | 대한민국 |
대표직함 | 훈련대장,한성부판윤,회령부사 |
부 | 안국(安國) |
모 | 권세임(權世任) |
성격 | 무신 |
유형 | 무장 |
정의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조선 중기의 무신.
설명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제주목사를 거쳐 1591년(선조 24) 강계부사로 있을 때, 유배되어 온 정철(鄭澈)을 우대하였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가 되어 황간·추풍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그 뒤 금산에서 왜군을 격퇴시키고 부상을 당하였다. 이 해 겨울 수원부사로서 수십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의 권율(權慄)을 지원하였다. 1593년 2월 권율과 함께 행주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어 가선대부에 가좌되었다.
조경(趙儆)이 권율의 중군장(中軍將)으로서 밤에 강을 건너가서 먼저 지형을 살피다가 군사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니 그것이 즉 행주였다. 권율이 말하기를, “명 나라의 군사가 많이 왔으니 적병이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성책(城柵)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니 경이,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 그때 체찰사(軆察使)가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율을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는 동안에 경이 모든 군사를 시켜 이틀 동안에 성책을 완성한 후에, 율이 돌아왔고, 목책(木柵)을 만든 지 사흘만에 적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이에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힘껏 싸우니, 적병은 드디어 긴 나무[長木]를 가져다가 다락같은 모양의 높다란 가마[轎]를 만들어서,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싣고 수백 명이 메어 올려 우리 진영 안을 사격하므로 조경이 지자포(地字砲)를 가져오게 하여, 큰 칼 두 개를 포(砲) 앞에 매어달고 적의 가마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포를 쏘니, 지나간 곳마다 천둥ㆍ벼락을 맞은 것 같아서 가마는 모두 부숴지고 가마 위에 있던 적병은 몸뚱이와 팔ㆍ다리가 흩어져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적병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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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 |
척계광이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편찬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새로운 진법을 1593년 명나라 장수 낙상지의 소청으로 받아들여 새롭게 편제된 훈련도감 당상을 겸하고, 이듬해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어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장의(莊毅)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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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 행주대첩 | A은 B에 참가하였다 | |
조경 | 추풍령싸움 | A은 B에 참가하였다 | |
정기룡 | 조경 | A은 B을 구하였다 | |
서울역사박물관 | 조경묘 출토 유의일괄 | A은 B을 소장하고 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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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 조경이 추풍령싸움에 참가하였다 |
1593년 2월 | 조경이 행주대첩에 참가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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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09167 | 128.008257 | 추풍령은 조경과 관련이 있다 |
37.600108 | 126.824711 | 행주산성은 조경과 관련이 있다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