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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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李恒福) | |
대표명칭 | 이항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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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恒福 |
영문명칭 | Lee Hang Bok |
생몰년 | 1556년-1618년 |
본관 | 경주(慶州) |
호 | 필운(弼雲), 백사(白沙), 동강(東岡) |
자 | 자상(子常)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백사집(白沙集),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
대표직함 | 이조참판, 예문관대제학, 의정부우참찬, 병조판서, 영의정 |
부 | 이몽량(李夢亮) |
목차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개요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이고, 호는 필운(弼雲), 백사(白沙), 동강(東岡)이다.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齊賢)의 방손(傍孫)이며, 이성무(李成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신(李禮臣)이고,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현감 최륜(崔崙)의 딸이다.[1] 권율(權慄) 장군의 딸과 혼인하였다.[2]
업적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항복은 이조·병조·형조판서·대제학·우참찬(이상 정2품)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에 원군을 요청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고, 결국 이여송(李如松)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또한, 명에서 파견된 사신과 장수들을 전담하다시피 만나고 접대했으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능란하게 해결했다.[3]
1598년(선조 31) 명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인 양호(楊鎬)를 무고하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이항복은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명에 파견되어 갈등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런 공로로 그는 1601년(선조 34) 호종(扈從)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4]
오성(鰲城)과 한음(漢陰)
오성 이항복과 함께 재상이 된 한음 이덕형(李德馨)과 어렸을 때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우정과 해학이 얽힌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온다.[5]
※ 참고: "오성과 한음의 기지와 해학"[6]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이몽량 | 이항복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이항복 | 권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이항복 | 조선 선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이항복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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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년 | 이항복이 태어났다. |
1618년 | 이항복이 세상을 떠났다. |
주석
- ↑ 김성균, "이항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항복",
『두산백과』online . - ↑ 김범, "이항복",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백과사전』online . - ↑ 김범, "이항복",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백과사전』online . - ↑ "이항복",
『두산백과』online . - ↑ 이병찬, "오성과 한음의 기지와 해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